곽병찬 대기자의 추모의 글

곽병찬 전 한겨레신문 대기자

“오현 스님의 영전에 막걸리 한 잔 올리겠습니다”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파격적인 페이스북 글에 용기를 내어 씁니다. 대통령선거 전 몇 차례 만났는데 그때마다 스님은 막걸리잔, 그것도 종이 막걸리잔과 함께하고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스님의 법호와 법명은 설악 무산입니다. ‘조오현 스님’은 속가의 이름이자 필명이지만 세상엔 오현 스님으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백담사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이자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 회주입니다. 1932년 생으로 7살에 집안의 군입 하나 덜기 위해 절집 소 꼴머슴으로 보내졌습니다. 젊은 시절 삶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산문을 나섰다가 돌아오길 몇 차례 하긴 했지만, 스님이 돌아갈 곳은 절집 밖에 없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법난을 일으키면서 그를 이 나라에서 쫓아내, 할 수 없이 미국에서 2~3년간 만행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산 스님의 가장 오랜 산문 이탈이었습니다.

지난 3월 동안거 해제와 함께 스님은 말도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습니다. 5월7일이 되어서야 처소인 강원도 인제 만해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만행 중 노구를 이끌고 어디를 다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속가의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을 다녀왔다느니 하는 몇몇 단편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돌아온 스님은 곡기를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자(박용기)가 끼니마다 공양을 챙겼지만, 스님의 밥상은 들어간 그대로 돌아나왔습니다. 스님이 몸에 들인 것은 오로지 막걸리와 물이었습니다.

안거를 끝내면 가끔 그렇게 ‘곡차’로 몸을 다스린 것을 잘 아는 터라 시자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하안거 입재도 머잖았으니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안거에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곡차를 완전히 끊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니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평소엔 손님을 맞는데 까다로웠던 분이 그 즈음엔 찾아오는 이 모두 맞아들이고, 거기에 생각지도 않던 분들을 처소로 불러들였다는 것입니다. 보기에도 뜬금없는 이들이 있어 시자는 의아해 하곤 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기피한다는 ‘외로운 늑대’ 장기표씨 같은 경우가 그런 초대 손님이었습니다. 그는 13일 스님의 부름을 받고 만해마을로 달려왔다고 합니다.

부처님오신날 전 날인 21일엔 이근배 시인 등 반평생 시의 길을 함께 했던 시인묵객들이 찾아왔습니다. 2주일째 곡기를 거부한 스님은 이들과 무려 4시간씩이나 호탕한 담화를 나눴습니다. 부처님오신날 당일 시인 일행을 떠나보낸 뒤 조용히 보낸 스님은 23일 전례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봉축 행사를 마친 3교구본사 스님들을 일일이 맞았습니다. 오후엔 무슨 바람인지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와 김한수 기자(조선일보)가 찾아왔습니다. 이어 저녁엔 용대리 주민 대표들을 불러 담소를 했습니다. 그날도 스님 옆에는 물과 막걸리만 있었습니다.

그 사이 주변에서 못 알아들었을 뿐 스님은 특별한 당부나 조처를 하곤 했습니다. “내가 가면 민간인 호상은 이근배 시인이, 절집 호상은 정휴당이 맡으면 되겠지?” 시인묵객과의 만남에서 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시인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동안 귀에 익은 이런 이야기의 변주로 여기고 흘려보냈다고 합니다. “중 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렇게 오래 살아서야 되겠나. 빨리 가야지. 이 나이에 더 살면 욕이지.” 게다가 스님은 “아주 구성지고 신나는”(이근배 시인) 염불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했으니, 의심이 비집고 들 틈이 없었습니다.

 

설악 무산 대종사

 

이튿날 용대리 주민들과의 만남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한 마디 툭 던졌답니다. “나 가면 용대리 주민장으로 치러주시게나.” 두툼한 봉투 하나 건네면서 말입니다.

그동안 스님은 인제군 특히 용대리에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장학금은 물론, 적잖은 수익이 보장되는 용대리-백담사간 셔틀버스 운행권도 마을에 넘겼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평소 스님의 그런 ‘통’에 익숙했던 터였고, ‘주민장’은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튿날 스님은 늦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6시면 참선이나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스님이었습니다. 7시 반이 넘어서도 조용하자 시자는 스님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스님은 잠자리에 누운 채 다만 이렇게 당부했답니다.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으니, 그리 전하게나.” 마침 만해마을엔 권영민 교수가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스님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후 들어 스님의 방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괴로웠지만, 구급차를 부르겠다는 말에 손사래만 쳤습니다. 그런 실랑이를 서너 차례 하는 사이, 스님은 고통으로 정신마저 희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곧 속초 병원으로 실려 갔고,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강릉 아산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다행히 응급조치 후 스님의 혈압이나 호흡은 안정되었습니다. 이튿날 스님은 이전의 원기를 되찾는 듯 했습니다. 달려온 권영민 홍사성 등 속가 제자들에게 ‘웬 소란이냐’고 짐짓 역정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도 했습니다. ‘참으로 떠나기 힘들구나.’ 스님의 마음을 모르는 제자들은 회복을 낙관하며 기뻐했습니다.

26일 오전 스님의 호흡은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습니다. 맥박은 급전직하 떨어졌습니다. 급기야 심장제세동기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스님의 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담당의사가 말했습니다. “더 이상의 충격은 몸만 상하게 합니다.” 더 이상의 연명조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스님은 이미 작정한 길로 떠나가고 있었고, 또 떠났다는 것을. 참 어리석었습니다.”(시자) 오후 5시11분, 스님의 영혼은 87년간 함께 했던 몸에서 떠났습니다.

돌아보니 스님은 지난 3월, 동안거 해제와 함께 떠날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서울에 오면 머물던 작은 오피스텔도 처분했습니다. 당신이 태어난 고향에도 들렀습니다. 그 즈음 이근배 시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답니다. “밀양 약수암이 없어졌나봐. 찾을 수가 없어.” 약수암은 스님이 한동안 머물면서, 마산의 시동인 ‘율’과 함께 시작 활동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밖에 어떤 인연을 찾아다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해마을 처소로 돌아와선 작별을 고할 사람들을 찾아 정담을 나누고, 떠난 뒤 할 일들을 하나둘 정리했습니다. 장례식 호상, 장례 형식 등. 할 일을 마치자 숨을 줄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21일 시인묵객들과 만남은 그중에서도 스님 생각에 가장 뜻깊은 고별행사였던 거 같습니다. 스님은 곡차 선정에 들자, 뜻밖에도 염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50년 지기인 이근배 시인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스님이 그렇게 염불을 잘 하시는 줄 몰랐지….” “마하반야바라밀다 나무나무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몰래 녹음한 것들 들어보니, 염불은 염불이로되 시조창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오동나무가 간직한 천년의 소리처럼, 평생의 가슴속 소리를 시조창 형식의 염불로 꺼낸 것이었습니다. 백조의 마지막 노래를 떠올리는 이도 있지만, 슬픔이나 아쉬움의 찌꺼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염불을 끝낸 스님은 다시 한 번 당신의 작정을 슬그머니 내비쳤습니다. “내가 죽을라고 돌아보니, 시님(스승 성준 스님)께서는 대강백이셨지….” 오래전 입적한 스승께 그 자리를 빌어 이승에서의 하직 인사를 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스님은 지금 어디선가 황망해하는 이들을 보며 장난끼 그득한 얼굴로 이렇게 속삭일 듯합니다. “몰랐지? 진실은 밥상의 밥그릇처럼 늘 우리 곁에 있는 법이지. 먹고 마시고 자고 이야기하고 웃고 울고 안타까워하는 그런 일상 속에 말이야. 그걸 알아차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닌가봐. 진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어둡고 먼 눈과 귀 탓이겠지.”

스님은 마지막 며칠 그렇게 곡차와 함께 당신에게 남은 것들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30일 다비식이 열립니다. 하지만 스님의 법구에서 더 무엇을 태울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경허선사여! 천화하여 어느 곳으로 가셨나이까? 술에 취해 꽃 속에 계십니까.’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 초막에서 입적한 스승 경허 스님을 추모하는 만공스님의 게송입니다. 눈 귀 어둡고 몸은 게으르기까지 한 이 사람, 만공 스님의 게송에 이 한 줄 덧붙여 추모의 글을 대신합니다. “무산 선사여, 그곳의 곡차는 얼마나 향기롭길래, 그리도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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