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층목탑은 없지만 연꽃보고 미소짓네

 

 

구황동 당간지주가 서 있는 황룡사지 인근에 백일홍이 만개했다. 분황사 남쪽에 서 있는 당간지주 일대에는 방문객을 위해 경주시에서 매년 색다른 꽃을 심어 일대를 장엄하고 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황룡사 역사문화관.

연꽃 활짝 핀 동궁과 월지 

지난 11일 새벽에 비가 그치더니 경주에 도착하니 햇살이 강렬하게 내려쬔다. 먼저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동궁과 월지는 과거 안압지로 불리는 곳으로 신라 왕궁의 별궁이다. 동궁과 월지 앞에 연못에 연꽃이 활짝 피어 있다.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은 회화와 조각, 공예, 건축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져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상징적으로 전해준다. 연꽃의 특징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더러운 곳에서 자라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다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다. 또 화과동시(花果同時)도 있다. 

대부분의 꽃들은 꽃이 지면 열매를 맺지만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힌다는 뜻이다. 우리 흔히 ‘내가 잘돼야 남을 돕지’ 생각하지만 가끔씩 뉴스를 통해 넉넉지 않은 환경에도 이웃을 위해 기부를 하거나 봉사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 분들이 바로 ‘화과동시’ 즉 연꽃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이 밖에도 연꽃의 씨는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환경이 맞으면 다시 발아한다. 이런 신비로운 연꽃이 상상의 꽃이 아니라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름다운 연꽃을 한 송이 한 송이 감상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서둘러 오늘 목적지인 황룡사지로 향한다. 황룡사지에는 경주시가 백일홍을 심어서 넓은 꽃밭이 되었다. 꽃밭을 지나 황룡사의 금당지 목탑지를 둘러보니 당시의 거대한 규모가 실감이 난다. 황룡사는 566년(진흥왕 27년)에 1차 낙성을 하고 569년에 주변 담장을 세우고 573년 또는 574년 장육존상을 584년에 금당을 645년(선덕여왕 14년) 구층목탑을 세웠다. 무려 90년에 걸쳐 불사를 진행해 완성한 신라 최대, 최고 사찰이였다. 

금당지에는 당시 금동장육삼존불상을 받치고 있었을 대좌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장육상은 1장6척으로 5m 가까운 크기의 거대 금동불이였다. 

①황룡사 구층 목탑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아쇼카왕이 보시한 장육삼존불상 

지금은 사라진 장육삼존불상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온다. 진흥왕이 절을 착공한 뒤 어느 날, 하곡 현(지금의 울주)에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관원에게서 상소가 올라왔다.

“지금 하곡현 실포에 낯선 큰 배 한척이 들어왔는데 사람은 없고, 많은 상자들과 문서 한통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 문서만을 보내옵고, 배와 물건들은 군사를 시켜 지키고 있사오니 하명이 계시기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진흥왕이 문서를 열어보니 ‘인도의 아소카왕이 구리 5만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삼존 불을 조성하려고 세 번이나 주조하였으나 실패하여 할 수 없이 구리와 금과 철을 모두 배에 실어 띄워 보내니, 인연 있는 국토에 이르면 배에 실어 보내는 모형대로 장육존상과 협시보살을 이루어 달라’는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다. 

장인들을 불러 574년 3월 구리를 녹여 본존상을 주조하고, 철을 녹여 협시보살을 주조하여 금을 입히니 인도에서 이루지 못한 삼존대불이 신라에 와서 단 한번 만에 이루어졌다. 

본존불 무게는 구리 3만5천7근, 금이 1만1백98푼이나 되었다고 한다. 

금당에는 장육삼존불상 뿐 아니라 한쪽 벽에는 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의 그림이 있었는데 그 중 소나무 그림 한 폭은 얼마나 잘 그렸는지 마치 살아 있는 나무와 흡사하였다고 한다. 법당 문을 열면 새들이 날아와서 앉으려다가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했다고 전해진다. 

②박물관에 전시되 있는 황룡사 모형.

황룡사 9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 

금당 앞쪽에는 황룡사의 큰 자랑이였던 9층 목탑이 서 있었다. 수십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어 당시의 거대한 규모를 가늠케 한다. 당시 높이가 80m(혹은 65m)로 신라의 최고 높이 건물이였다. 금당과 목탑, 754년 조성된 황룡사 종, 경루, 강당, 회랑 등은 1238년 몽골 군대에 의해 모두 불살라져 사라진다. 황룡사 종은 무게가 41톤으로 18.9톤인 성덕대왕신종 보다 컸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다. 

오랜 기간 폐허가 되어 있던 황룡사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0년대였다. 당시 문교부는 사적의 보존을 위해 목탑지위의 민가를 철거하기 시작한다. 1964년 민가를 철거하자 목탑의 중심 주춧돌인 심초석(心楚石)과 그 위의 네모난 큰 돌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해 12월17일 심초석 아래 사리장치가 도굴당하는 일이 생겼다. 그 도굴꾼들이 1966년 9월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구를 훔치려다 검거됐고 그해 12월 우여곡절 끝에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되찾은 유물 중에 872년 목탑을 중수할 때 넣은 황룡사 찰주본기가 있다. 사리를 감싸는 내함인데 여기에는 목탑이 건립된 내력 중수한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 ③백률사로 돌아가야 할 국보 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9월2일까지 열리는 국립경주박물관 황룡사 특별전에 가면 찰주본기를 볼 수 있다. 몽골에 의해 불타 사라진 안타까운 황룡사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지만 여기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을 통해 당시의 영광을 떠올릴 수 있다. 덤으로 더위에 지친 몸도 잠시 식힐 수 있어서 좋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큰 박물관으로 황룡사 특별전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가볼 만한 곳이다.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오는 신라의 아름다운 불교 성보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신라미술관에는 국보 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는데  불교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백률사에 있던 부처님이다. 1930년대 전시를 하기 위해 경주국립박물관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옮겨간 뒤 돌려주지 않고 있다. 원래 자리인 사찰로 돌아가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약사여래부처님으로 예경 받으셔야 할 터인데 박물관에 한 쪽 벽면에 서 계신 모습을 보니 안타깝다.

신라가 사라진지 3백년, 진각국사 혜심스님(慧諶, 1178-1234)이 황룡사 탑에 올라 시를 남겼다. 一層看了一層看 한 층을 보고 나서 한 층을 다시 보니/步步登高望漸寛 걸음걸음 높이 올라 전망 점점 틔여지네./地面坦然平似削 지면은 평탄하여 깎은 듯이 평평한데/殘民破戶不堪觀 피폐한 백성 부서진 집 차마 보지 못하겠네. 스님 눈에는 거대한 탑보다 백성의 아픔이 더 가슴에 남았나 보다. 오전에 본 연꽃의 화과동시 같이 스님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마음이 구층목탑 보다 높다.

④동궁과 월지 앞 연밭

[불교신문3409호/2018년7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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