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한결같이 불지종가 명맥 이어

 

국보 290호 통도사 금강계단 앞으로 대웅전이 보인다.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이운해 온 자장율사는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에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사진=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삼국유사’ 등 기록으로
천년고찰 통도사를 읽다

영축총림 통도사(通度寺)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보사찰(佛寶寺刹)이다. 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 앞에 건립된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금강계단을 향해 예경한다. <통도사약지(通度寺略誌)>에 따르면, 사찰에 건립된 산의 모습이 부처님이 설법한 인도 영축산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영축산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보면 원래 통도사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사찰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왜 ‘통도’라는 이름을 갖게 됐을까. 구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설법한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 靈鷲山形)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 스님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계단을 통과해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는 의미라고 하고, 모든 진리를 통달해 중생을 제도하라(通諸萬法度濟衆生)’ 뜻이라고도 한다. 정리하자면 스님이 되려면 부처님이 설법하셨던 인도 영축산과 닮은 통도사 계단을 통과한 후 진리를 통달하란 말로 해석할 수 있다.

통도사 창건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선덕여왕(재위 632~647) 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 ‘황룡사구층탑’ 조에 보면 “황룡사 찰주기에 따르면, 자장이 오대산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황룡사구층탑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과 태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통도사 창건을 주도한 자장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4 ‘의해’ ‘자장정율조’에 상세히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귀국 후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7일 동안 설했더니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 사부대중이 탄복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칙명으로 자장율사를 대국통으로 삼았고, 스님은 반달마다 계를 설하고 겨울과 봄에 시험하게 해 지계와 범계를 알게 했다. “나라의 사람들이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것이 열 집에 여덟아홉이었고, 머리를 깎고 출가하기를 청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늘었다. 이에 통도사를 창건해 계단을 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출가하게 했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643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이운해온 진신사리를 봉안했고, 황룡사 구층목탑이 646년(선덕여왕 15)에 건립된 것을 토대로 통도사도 같은 해 창건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통일신라시대 계율 근본도량이었던 통도사의 명성은 고려시대 때도 이어졌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진신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통도사로 향했다. 남무희 국민대 교수는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을 기념해 발간한 <통도사를 담아내다> 중 ‘통도사 역사’를 다룬 논고에서 고려중기 불교계를 주도하는 사원으로 통도사를 지목했다. 

“1085년(선조 2)에 이르면 통도사 극락전 앞에 배례석이 설치되고 호부(戶部)에서는 공문을 내려 사역 주변에 12대 국장생표를 설치하는 등 통도사에 대한 국가적인 시책이 전개”된다며 “계율종과 불사리 신앙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장생표란 나라에서 세운 장생표로 사찰 소유 토지 범위를 보여준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에서는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고종(1213~1259) 때 왕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했을 때 절에 들러 사리를 친견했다고 한다. 스님이 난처해하는 중에도 굳이 군사를 시켜 돌을 들더니 안에 작은 석함 속 유리통에 들어 있는 사리를 서로 돌려보며 예경했는데, 유리통이 금간 것을 보고 유공이 갖고 있던 수정함을 시주했는데, 당시 사리 4매가 납입돼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원나라 사신들도 통도사 금강계단 불사리를 예배하고 인도 출신 지공(?~1363)스님은 1326년 통도사 금강계단을 참배하고 석가모니부처님 가사와 사리 친견 후 ‘사리가사 계단법회’를 봉행했다고 부연했다. 말기에는 왜구가 진신사리를 약탈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불종찰약사(佛宗刹略史)>에 따르면 1340년(충혜왕 복위 1)부터 1369년(공민왕 18)까지 사찰 곳곳에서 불사가 이뤄졌다.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사리를 지켜낸 월송대사(月松大師)가 1379년 사리탑을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이 주로 전해진다. 대광명전 현판에는 1756년 10월에 불이나 법당 4곳과 스님들 요사채 4곳 창고 10칸이 전소돼 3년 뒤 불사해 비로자나 불상과 후불도를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종찰약사>는 또 18~19세기에 4건 정도 계산을 보수했고, 1838년에는 경기도 함경도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등 전국에서 보시해 불사가 이뤄졌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도 금강계단의 위상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현대에도 많은 스님들이 통도사의 법등을 이어갔다. 오늘날까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불지종가(佛之宗家)로 수식되고 있다. 성해스님은 통도사 승통을 지내며 사격을 일신했다. 구하스님은 통도사 주지와 불교중앙학림 학장을 맡아 포교와 승가교육에 일조했고, 상해임시정부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에도 일조했다. ‘영축산 도인’으로 불린 경봉스님 외에도 해방 이후 벽안스님과 월하스님 등은 조계종은 물론 총림으로서 통도사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동진(東晋)시대 법현스님이 한역한 <대반열반경>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다비를 마치면 사리를 수습해 황금 병에 모시고 곧 그곳에다 투파(兜婆, 탑)를 세우되 표찰(表刹)로 장엄하며 비단 번기와 일산을 걸고,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매일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고, 가지가지로 공양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 열반과 다비에 의해 시작된 사리신앙은 인도를 거쳐 중국과 우리나라로 전해진다. 사리는 곧 부처님이요, 사리를 봉안한 탑 또한 부처님이었다. 통도사 금강계단도 마찬가지다.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기 때문에 금강계단 앞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았다.

통도사 불이문서 바라본 경내. 사진=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부처님 진신사리 지키려
고군분투한 통도사 스님

창건 이래 지금까지 진신사리를 지켜내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1377년(고려 우왕 3) 왜적이 침입해 불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주지였던 월송대사가 깊이 감췄는데, 1379년 다시 왜적이 쳐들어오자 몸에 숨겨 수도 개경까지 피신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은 <목은집>에 남아 있다. 또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는 왜적에게 불사리를 약탈당하기까지 했다. 

당시 동래에 사는 백옥거사(白玉居士)가 왜적에게 잡혀 있다가 사리를 찾아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러자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사리함 두 개를 금강산의 휴정대사(休靜大師)에게 보냈고, 한 개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하나는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했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1603년(선조 36)에야 비로소 정비도 비로소 사리를 봉안할 수 있었다. 1705년 발간된 <사바교주계단원류강요록(娑婆敎主戒壇源流綱要錄)>이나 1702년 조성된 ‘석가여래 영골사리 부도비((靈骨舍利浮圖碑)에 이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통도사사적약록> ‘사리영이(舍利靈異)’에서는 사리의 신령함을 여덟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 사리를 예경하면 다섯 가지 법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인연 유무에 따라 사리가 나타나기도 하고 밝게 빛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예배할 때 맑은 하늘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고, 비 내리던 하늘이 갑자기 개어 길흉을 알지 못한다. 네 번째는 계단석종 위에서 오색광명이 비쳐 산과 골짜기를 밝히고, 향과 초를 공양하고 정진하면 계단 반상에 사리가 모래알처럼 나타난다. 또 몸과 마음이 부정해 하심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일원(一院) 중에 악취가 나 부정한 사람을 광란에 빠트린다. 

석종 부도 위 여의주석 구룡반석 아래 움푹 파인 곳에 항상 물이 가득한데 그곳에 붙어 있는 한쌍의 푸른 달팽이는 사람이 보면 사방으로 흩어져 보이지 않다가, 사람이 흩어지면 전과 같이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날짐승이 금강계단 위로 날아가지 않고, 주변을 시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간에서는 황룡사 구층목탑과 통도사 금강계단의 신이한 관계에 대한 얘기도 있다. 황룡사 탑이 불에 타던 날 금강계단 위를 덮은 돌뚜껑 동쪽 면에 처음 큰 반점이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진각국사 혜심스님이 1222년 통도사 금강계단을 참배하고 지은 시를 새긴 ‘무의자제통도사 현판’을 보면 “듣건대 황룡사의 탑이 불타던 날에 연이어 한쪽을 태우면서 꿈쩍도 않았다”고 해 구전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불교신문3410호/2018년7월21일자]

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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