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6> 안동 봉정사

안동시 천등산 아래 자리한 봉정사(鳳停寺)는 ‘한국의 건축박물관’으로 불린다. 사진=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첫 번째 여름휴가지로 지난 7월 말 안동 봉정사를 찾았다. 청와대는 ‘산사에서 보낸 7월 마지막 주말’이라는 브리핑을 통해 “유네스코 등록 산사와 산지승원 7개 중 유일하게 가보지 못한 봉정사를 방문해 현존하는 최고 목조건축물인 극락전과 다포계 건축물 최고인 대웅전, 영산회상도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고 전했다. 김정숙 여사와 함께 한 사진 속 문 대통령은 불교의 넉넉한 가르침에 매료된 듯 한 모습이다. 

사실 알고 보면 봉정사는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과 방문이 있었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태조(太祖)와 공민왕(恭愍王) 등이 행차했고, 지난 1999년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을 방문하면서 이곳을 찾아 한국불교의 진수를 체험했다. 당시 영국 여왕은 “가장 한국적인 건물을 보고 싶다”고 했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봉정사가 선택됐다. 이로 인해 봉정사는 세계적 유명세를 얻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동승’ 등 불교 영화가 촬영된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상한 선비의 격조 높은 집과 정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산암 응진전.

봉정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도 손꼽을 만큼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가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도 화를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최근까지 여러 차례 중수가 이뤄지면서 본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능인스님이 창건했다. 이곳에서 의상대사는 화엄강당을 지어 후학들에게 법을 전했다고 한다. 의상대사는 신라 땅 곳곳에 가람을 창건해 화엄 사상의 전파에 힘을 쏟았으며, 이 과정에서 3000명이라는 많은 제자가 대사의 법을 이었다. 그 가운데 열 명의 제자가 특히 뛰어나 대덕(大德)이라 했는데, 능인스님은 바로 이 10대덕 중의 한 인물이다.

창건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도 전해져 온다. 절이 들어선 천등산은 옛날 대망산이라 불렸다. 정상 가까이에 거무스름한 바위 하나가 있고, 이 바위 아래 동굴이 있었다. 능인스님은 이 바위굴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잊고 정진에 몰두하고 있었다. 십 여 년을 줄곧 수행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나타나 낭랑한 목소리로 스님을 불렀다. 스님이 미처 고개를 들기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 여인은 “낭군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해 이렇게 찾아왔으니,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며 매달렸다. 그러나 스님은 그 여인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공적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고 했더니, 이내 여인은 사뿐히 하늘로 오르며 사라졌고, 대신 굴 주변이 환하게 비춰졌다.

그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스님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이제 스님의 깊은 의지를 알았으니 부디 깨달음을 이루시길 빕니다. 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옥황상제의 등불을 남기고 떠납니다.” 곧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놓였고, 마침내 신라의 대표적 고승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능인스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등으로 수도했다고 해서 그 굴은 ‘천등굴’ 대망산은 ‘천등산’으로 바뀌게 됐다고 한다.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봉정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로까지 이어진다. 능인스님은 수행을 마친 뒤 법등을 밝힐 절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려 보냈더니 학가산을 거쳐 지금의 절 자리에 앉았고, 스님은 그 자리가 명당터임을 알았다. 마침내 672년 가람을 세웠는데 봉황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봉정사’라고 했다. 봉정사는 불교 박해를 강화했던 조선시대에도 지역 성리학자들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살아있는 승원으로 유지발전 됐다. 

안동은 16세기 이래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였다. 영남 성리학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사찰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스님과 사림(士林)들과의 문화교류가 큰 역할을 했다. 봉정사 응진전 구역 건물 배치는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ㅁ’자형 배치를 반영한 것이며, 입구 누문인 덕휘루(후에 만세루로 개칭) 편액명은 성리학 정신을 반영했다. 저명한 성리학자인 이황(1501~1570)과 그 문하생들은 자주 이곳을 찾았고, 그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1665년 사찰 인근에 명옥대가 건립되기도 했다. 경전 간행을 위해 간역소(刊役所)를 운영했는데, 이곳에서 지역 문인들 문집도 출판하고 관리하며 사찰 경제에 보탰다.

경내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봉정사는 전문가들에게 우리나라 건축미술사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꼽힌다. 특히 현존하는 전각을 찬찬히 살펴보면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높은 사격을 지녔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봉정사 극락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고려 중엽의 건물인 극락전,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 조선 후기 건물인 고금당과 화엄강당 등은 모두 우리나라 목조 건축사의 한 흐름을 보여준다. 봉정사 극락전은 1972년 전각을 중수할 때 1363년에 중수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돼 우리나라에 현재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최소한 고려 중기 이전에 세운 전각임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러한 최고의 건축공간으로만 보더라도 봉정사의 옛 사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옛날엔 암자도 많이 거느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영선암과 지조암, 중암만 남아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영선암은 꼭 가봐야 한다. 영산암은 마치 고상한 선비의 격조 높은 집과 정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탐방객이 이곳을 지나쳤다면 옳게 본 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무더운 여름날 봉정사로 역사문화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봉정사는 보물창고…세계유산 등재 이유 있었네

도량 곳곳에서 만나는 성보 역시 ‘명불허전’

봉정사에는 국보와 보물이 가득하다. 극락전(국보 제15호)을 비롯해 대웅전(국보 제311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안동 봉정사영산회상벽화(보물 제1614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 영산회괘불도(보물 제1642호), 아미타설법도(보물 제1643호) 등 이 있다.

특히 극락전(極樂殿)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 건물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가치가 높다. 극락전은 1363년(공민왕 12)에 대규모 지붕 공사를 다시 했다는 기록이 발견돼 적어도 고려 중기인 12~1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극락전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평가하며 “지붕이 높지 않고 낮게 내려앉아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아주 야무진 맛을 풍긴다”고 찬사를 보냈다.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웅전 또한 봉정사의 귀중한 성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 말·조선 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안쪽에 단청이 잘 남아 있어 이 시대 문양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

1997년 발견된 영산회상벽화는 현재 보존처리 후 사찰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벽화는 현재 정확한 제작시기를 단정할 수 없지만 대웅전 해체수리 때 발견된 1435년의 <대웅전중창기>, 1436년의 정면 어칸 기둥 묵서명 등을 통해서 볼 때 1435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짐작하고 있다. 따라서 봉정사 대웅전벽화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영산회상도>로서 1476년 <강진무위사아미타후불벽화>와 함께 조선 초기 불화의 쌍벽을 이루는 벽화로 손꼽힌다. 이후 전개될 군도형식의 영산회상도는 물론 여타 불회도(佛會圖)의 조형(祖型)이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화면은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훼손된 부분이 많아 제 모습을 상당히 잃었으나 구도 및 색채 그리고 일부의 문양 등은 판별이 가능하다. 내용은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들이 에워싸고 있는 도상으로, 남아 있는 화기를 통해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하실 때의 장면을 도해한 영산회상도이다.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대웅전에 봉안됐다가, 산내 암자인 지조암으로 이운됐다고 한다. 그러다 200년 만세루에 있던 ‘대웅전관음개금현판’ 기록을 확인하면서 목조관음보살상의 존재가 드러났다. 고려 후기인 1199년에 조성됐다는 기록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영락장식이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보살의 가슴과 천의 위로 화려한 장식이 돋보인다. 보살의 천의는 양쪽 어깨를 모두 덮고 있으며 가슴과 소매 쪽으로 굵은 띠가 보인다. 가슴과 배, 양쪽 무릎에는 영락장장식이 새겨져 있다. 소매주름 사이와 양쪽 허벅지 부근으로도 장식을 해 아름다움을 더했다.

■ 권영세 안동시장 기고 / “세계유산 등재는 안동의 기쁨”

봉황(鳳凰)이 머무르고 꽃비가 내리는 아름답고 고즈넉한 자리에 앉아 있는 천년 고찰의 봉정사에 아름답고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인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산사, 한국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한국에 있는 7개의 사찰이 지난 6월 30일에 바레인에서 개최된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안동 봉정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 전해지는 즈음에 문재인 대통령께서 사찰에 방문해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해주시어 더욱더 기쁘며 한편으로는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의 보존관리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안동 봉정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신라시대의 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입니다.

능인대덕이 수련을 마치고 종이 봉황을 날려 그 봉황이 머문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하여 봉정사라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봉정사에는 예부터 전해지는 전설을 비롯한 오래되고 너무나 소중한 문화유산이 즐비한 곳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물로 알려진 국보 극락전과 대웅전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화엄강당, 고금당 경상북도 지정문화재인 만세루 등의 건축유산은 살아있는 고건축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크나큰 자랑거리입니다. 또한 보물로 지정되어 봉정사가 소장하고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 영산회괘불도, 아미타 설법도 등의 불상과 탱화를 비롯한 동산문화재도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년의 세월을 소중히 간직하며 창건 이후 현재까지의 지속성, 한국 불교의 역사성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인 안동 봉정사와 함께 안동에는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은 유산들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이미 2010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역사마을 안동 하회마을, 2015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유교책판 역시 안동의 문화를 알리는 소중한 문화자산입니다. 또 내년에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 결정을 앞두고 있는 도산서원, 병산서원이 있습니다.

안동시는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어 기쁨과 함께 이를 보존하기 위한 마음의 무게도 한층 커졌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이번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결정하면서 보존관리에 필요한 4개의 권고사항을 주문하였습니다.

우리 안동은 그 권고사항을 성실히 준수할 뿐만 아니라 소중한 문화유산을 더욱 잘 보존하여 후세에게 길이 물려줄 생각입니다. 시인 이육사는 안동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또 시인 유안진은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역사를 간직하면서 천년을 지켜온 봉정사처럼 앞으로도 천년, 그 이상을 오롯이 이어갈 수 있도록 안동을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힘을 합쳐 노력하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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