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⑦ 순천 선암사

열흘에 한번 단장을 바꾼다는 유홍준 작가 말처럼 사시사철 꽃이 피고 지는 선암사는 숲을 빼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은 우거진 녹음 속 자리한 선암사 전경. 사진=선암사 제공.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선암사는 볼 것도 많고 예쁜 것도 많은 절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작가는 제 마음 속 문화유산으로 한글·청자·산사를 꼽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산사의 대표로 선암사를 콕 찝어 말했을 정도다. 처처마다 안 가본 곳 없는 그가 사시사철 변하는 선암사를 누리기 위해 해마다 사찰을 찾는 다는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 ‘선암사’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라고 썼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취화선’ 등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선암사, 무엇이 예술가들의 발길을 사로잡았을까. 빛과 소리, 바람 한 점의 낭만이 있는 선암사 매력을 따라가보자. 

선암사는 길부터 예술이다. 전남 순천 조계산 도립공원 내 선암사로 접어드는 길은 이미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대상을 받은 족보 있는 길이다. 선암사를 품고 있는 조계산 일원은 1998년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된 적이 있는데, 문화재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송광사와 선암사 경내는 사적으로, 송광사와 선암사를 둘러싼 조계산 일원은 명승지역으로 재분류된 바 있다. 절을 포함한 산 자체가 사적 2곳(제506호와 507호), 명승 1곳(제65호)으로 지정된 곳은 한국에서 몇 군데 없다. 그만큼 유서 깊고 경관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일주문을 향해 오르는 길목도 만만치 않다. 선암사 주변은 40~50년생 참나무 종류의 고목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동백나무, 단풍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등이 울창하게 있어 사시사철 녹음이 우거지다. 곳곳에 있는 편백나무와 야생 차밭이 뿜어내는 은은한 자연향은 장관에 운치까지 더한다. 경내 즐비한 천연기념물 제488호 선암매(仙巖梅)를 비롯해 수령이 600년이라 전해져 오는 선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삼성각 앞 와송(臥松) 등은 계절 상관없이 때마다 많은 이들이 선암사를 찾는 이유가 돼 준다. 

승선교. 사진=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선암사에 들기 전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나 승선교다. 선암사로 오르는 길, 눈을 부릅 뜬 장승을 지나면 먼저 익숙한 풍경과 마주하는데 풍경 달력에서 한번쯤 본 적 있는 무지개 모양 다리다. 보물 제400호 승선교로 우리나라 돌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 전해진다. 1700년 전후 건립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승선교는 계곡과 어우러진 조화미이며, 이음새 없이 커다란 돌을 맞물려 쌓은 기법이 선조들의 자연의식과 뛰어난 건축술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무엇보다 선암사천 계곡에 가로놓인 무지개 모양 승선교가 안쪽의 강선루와 어우러지는 장면은 우리나라 절집이 빚어낸 최고의 풍경으로 꼽힌다. 

선암사는 삼무(三無)라 해서 세 가지가 없다. 첫째는 사천왕문이 없는데, 조계산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줄 것이라 생각해 따로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대웅전 협시보살상도 없다.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불상이 마왕 파순의 항복을 받고 깨달음을 이뤄 부처가 되는 순간을 뜻하는 항마촉지인(손을 무릎 위에 얹고 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웅전 어간문도 없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지날 수 없기에 내생에 완전히 깨달을 수 없다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과 화재가 빈번했기에 전각 곳곳에 ‘(수)水’자나 ‘(해)海’자를 새겨넣어 재난을 피하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세월의 더깨를 간직한 곳

본디 선암사라는 이름은 절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 데서 따왔다. 선암사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529년(신라 진흥왕 3) 아도화상이 개산해 청량산 해천사라고 했다는 설과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로 창건해 선암사라 했다는 설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된 후 대찰로 자리 잡았으나 이후 여러 번의 전쟁과 화재로 피폐해지기도 하였는데, 특히 화재 피해가 많았었다. 전각 곳곳에 ‘(수)水’자나 ‘(해)海’자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같은 까닭이다.

울창한 산 속 자리잡은 선암사는 고요하지만 힘이 넘친다. 화재와 중창으로 여러 번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824년 중창 불사 이후 큰 변화 없이 옛 배치를 잘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때문에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의 빛바랜 단청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원통전에 걸려 있는 ‘대복전(大福田)’ 현판. 순조가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한다는 뜻으로 ‘큰 복의 밭’이라는 의미로 써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통전에 걸려 있는 ‘대복전(大福田)’이란 현판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후사가 없던 정조가 아들을 갖지 못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정조는 선암사 눌암대사에게 100일 기도를 부탁했고 이를 통해 순조를 얻게 됐다. 후에 순조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한다는 뜻으로 선암사에 ‘큰 복의 밭’이라는 의미의 대복전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후에 다시 천(天)과 인(人)자를 한 자씩 더 써 선물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선암사 내 모든 전각은 중심축을 따라 후면으로 갈수록 건물 기단이 높아지도록 배치돼 있는데 이는 산세를 해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일렬로 배치된 일주문과 범종루, 만세루를 지나 만나게 되는 대웅전 좌우로는 심검당과 설선당을 중심으로 요사채들이 배치돼 있는데, 압도적 위용을 자랑하는 다른 불교 건축물들과는 달리 좁고 낮다. 대웅전 뒤편에는 원통전과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이 자리해 있으며 그 위로 오르면 동서로 나란히 상선원과 정업원이 위치해있다. 상선원에는 달마전, 미타전, 응진당, 진영각 등 7개 전각을, 정업원에는 무우전과 각황전을 두었는데 단마다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도 특징이다.

오랜 세월을 지닌 데다 화재와 중창으로 여러 번 변화를 겪은 선암사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사를 많이 하지 않았다. 때문에 선암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200여 년 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모습으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화재 때마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마을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고 하는데 법당과 요사채부터 골목 골목 담장들이 꼭 민초들 눈높이에 맞춘 것처럼 높지 않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경내 모든 전각이 눈높이 보다 낮고 담장도 기껏해야 가슴 높이 정도다.

선암사는 ‘꽃’과 ‘나무’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열흘에 한번 단장을 바꾼다는 유홍준 작가 말처럼 사시사철 꽃이 피고 지는 선암사는 수종만도 100종이 넘는다. 수령이 600년에 달하는 선암사 백매와 홍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종 매화기도 하다. 고려 시대 대각국사가 선암사를 중창할 때 삼성각 앞 와송과 함께 처음 심었다고 전해진다. 3월 중순에 핀 청매화가 지면 4월엔 홍매화가 꽃을 피우고, 경내 즐비한 백철쭉은여느 철쭉과 비할 바가 아니다.

선암사에서 또 한 가지 유명한 것은 ‘깐뒤’다. 거꾸로 읽으면 ‘뒤깐’으로 지은 지 300년이 넘는 해우소를 말한다. 시인 정호승이 “실컷 울어라”라고 한 바로 그곳이다. 우리나라 목조 건축의 특징을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단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八’자형 맞배지붕, 심하다 싶을 정도로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사용한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자연계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는 조촐함을 드러낸다.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나무살로 이뤄져 있어 자연스럽게 환기가 이뤄지고 햇빛을 들어와 환하다. 선암사 해우소는 2층 구조인 탓에 깊기로도 유명한데 오죽하면 “초하룻날 변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선암사는 현재 사적 제507호로 지정돼 있으며, 송광사와 함께 선암사 일원이 명승 제65호로 지정돼있다. 보물 14건, 천연기념물 1건, 중요민속문화재 1건, 시도유형문화재 7건, 시도기념물 1건, 문화재자료 3건 등이 전해지며, 승선교와 강선루를 비롯해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고(故) 김수근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측간’이라 극찬했던 ‘뒤깐’도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명물로 꼽힌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딱 알맞은 크기로 정겹게 자리한 선암사는 오늘도 세월의 더깨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한 문인의 표현처럼 ‘깊은 산 속 깊은 절’이라는 말마따나 보고 또 봐도 식상하지 않고, 사시사철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다. 무엇보다 세월이 켜켜이 스민 경내는 자박자박 걷고만 있어도 하루해가 짧다.

수령이 600년 넘은 와송.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