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자현스님] 당신의 노후에 행복은 존재하는가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스님(봉은사 교육국장)은 불교공부가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위한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라고 강조한다. 자현스님이 서울 봉은사 불자들에게 강의하는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불교 공부는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위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가 된다 
자신의 설계자는
오직 자기 자신임을 자각하고 
더 늦기 전에 주저함 없는
과감한 실천의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진짜 공부가 쉬운 사람이 존재할까?

예전에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공부해라’나 ‘공부 잘하니?’라는 말은, 학창시절 가장 짜증 나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눈에 띄는 책 제목으로는 진짜 이만한 것도 없지 싶다. 그러나 막상 책 내용을 보면, 진짜 공부가 쉬웠다기보다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해야만 했던 험한 일들에 비해 공부가 쉬웠다는 의미였다.

율곡을 흔히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하는데, 이는 율곡이 9번 장원급제 즉 전국 1등을 했다는 의미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이 3년에 한 번씩 치러졌고 율곡이 49세에 임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간에 특별시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과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 다섯 번 장원한 기록이 있고, 율곡의 비판에 ‘1등 하려고 과거시험을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진짜 공부를 잘했다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럼 율곡에게는 공부 스트레스가 없었을까? 물론 『율곡전집』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그러나 『퇴계전집』에는 선배인 퇴계에게 율곡이 공부 스트레스를 하소연하는 대목이 나온다. 율곡 역시 공부가 재밌고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율곡 같은 사람도 그럴진대, 평범한 우리들은 어떻겠는가? 때문에 공부란, 학창시절에 좀 더 좋은 직업을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하고 그 이후에는 담을 쌓는 것이 아닐까? 사실 최근까지는 이렇게만 사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충분했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손주들 재롱이나 보다가 삶을 마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맞이한 장수의 시대

기성세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환경과 의료 그리고 영양공급이 좋아지자, 불현듯 ‘장수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가장 좋은 복은 다름 아닌 장수였다. 이는 『상서』 「홍범」에 등장하는 오복의 첫째가 수壽인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환갑이 동네잔치였던 시절은 사라졌고, 두보가 〈곡강시曲江詩〉에서 70을 사는 것은 고금에 드물다고 했던 고희古稀라는 표현 역시 생소하게 되었다. 즉 예전의 노인 기준인 60세는 이제 또 다른 인생의 개척기일 뿐이다.

100세 시대에는 정년 이후의 삶이 무려 40년이 넘는다. 때문에 은퇴 후에 맞이하는 제2의 직업이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할 취미의 가치가 증대하고 있다. 만 65세에 정년퇴직을 한 어떤 대학교수가 90이 넘어서 했다는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나는 정년 후에 나를 위한 다른 공부를 시작했을 것이다’는 말은 이제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즉 과거의 공부가 좋은 직업의 선택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노년을 행복하게 살찌울 수 있는 공부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점에서 행복에 근육을 만들어주는 공부는, 오늘날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하겠다.

행복한 공부로서의 인문학과 불교

현대사회의 빠른 변화는 나이 든 사람에게 소외를 유발하기 쉽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IT 기기의 활용도에 따라서, 같은 공간 안에서도 깊은 소외의 골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도래할 4차 산업 시대에는, 이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에 능력과 삶의 질은 더욱 현격한 차이를 발생하게 된다.

중년이 넘으면, 제아무리 IT 기계에 익숙하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즉 가속화되는 빠른 변화 속에서 내팽개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인식 속에서 대안으로 대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이란, 느린 변화 속도와 이미 검증된 안전하고 높은 완성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중년의 공부는 행복한 삶을 위한 취미로서의 공부가 되어야 한다. 축구나 골프처럼 육체적인 스포츠 외에도 스포츠에는 바둑과 같은 두뇌 스포츠가 존재하는 것처럼, 취미에도 공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공부는 스트레스가 아닌 즐기는 공부이자 행복을 위한 공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들면, 이런 인문학적 가치 역시 무력화된다. 나이 70이 넘으면, 공부 능력이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때가 되면 공부만 문제가 아니라, 운동 등 신체적인 움직임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후로도 우리에게는 남은 삶은 무려 30년이나 된다. 이때 조금만 준비를 잘못해서 실족하는 날이면, 우리는 무기징역과 같은 기나긴 비극의 나날을 보내야만 한다.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바로 이 부분의 해법에 인문학을 포함하는 종교인 불교가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처럼 초 논리적인 신을 믿는 종교는 인문학과 공존할 수 없다. 즉 신은 믿음의 대상이지 논리의 접근을 통한 추구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종교인 불교와 유교, 도가(도교)는 신보다도 진리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과 결합된 종교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실제로 이들 동양종교는 대학에서도 인문대(문과대) 안의 철학과에서 가르친다. 이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철학의 밖인 신학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유교와 도가(도교)는 오늘날 종교로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한다. 즉 철학만 남은 죽은 종교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종교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불교에, 오늘날 100세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하고 답사하고 기도하라

중년 이후 공부는 반드시 나를 세우는 취미로서의 공부여야 한다. 즉 성적이 아니라 성취가 주가 되는 행복한 공부여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교육론은 책에 있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학습하는 단선적인 방식의 교육 효과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답사가 겸비되는 공부야말로 입체적인 동시에 효율적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문화재의 절대다수를 포함하는 불교야말로 매우 맞춤하다. 선지식의 안내에 따라 함께 하는 불교답사는 몇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유익한 공부가 된다. 또 불교답사에는 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현장에서의 정취와 종교적인 거룩함이 함께 녹아 있다. 여기에 기도나 명상까지 겸비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유홍준 선생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답사에서 공부는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공부와 답사는 상보적일 수 있다. 특히 공부가 어려운 분들은 역으로 답사나 성지순례를 통해서도 공부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 공부는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불교는 스스로를 확립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복한 종교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 공부는 필연적으로 기도와 명상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제자들을 성문聲聞 즉 많이 들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식을 기반으로 번뇌를 끊고 당당히 해탈에 이른 분들이기 때문이다. 나이 90에 가까우면 제아무리 건강관리를 잘한 분이라도, 거동에 불편함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명상과 같은 스스로의 안정된 힘뿐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불교 공부는 행복한 인생과 아름다운 회향을 위한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노력이라고 하겠다.

불교 공부는 인간의 행복을 담보한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쥔 주먹’은 없다는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당시에 지식이란, 소수의 사람들만이 서로 전하며 독점하는 공개되지 않는 비밀이었다. 이는 우파니샤드가 ‘스승과 제자가 무릎과 무릎을 맞대고 지식을 전수한다’는 의미인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시대적 금지를 넘어 구하는 모든 이들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바로 쥔 주먹 즉 감추어진 부분은 없다는 언급이다.

부처님의 열린 교육론은 앎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자유와 행복의 가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불교 공부는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위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가 된다. 자신의 설계자는 오직 자기 자신임을 자각하고, 더 늦기 전에 주저함 없는 과감한 실천의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자현스님│중앙승가대 교수·봉은사 교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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