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로 간 한국불교, ‘지구촌공생회’

탄하스님.

■ 4년 근무 마치고 귀국하는 탄하스님

선교사 700명에 스님은 한 명
기독교 국가에서 자비행 실천
친화력 성실성으로 매사 열심
종교 떠나 모두 스님일 도와

케냐 지부장 탄하스님이 9월 말 한국으로 돌아간다. 4년 만이다. 종교 인종 모든 것이 다르고 낯선 아프리카에서 지구촌공생회가 성공리에 안착한 것은 전적으로 지부장 탄하스님 덕분이다.

나이로비 시내 호텔을 들어선 순간, 마사이족이 아프리카인 특유의 활발하고 격정적인 몸짓과 사냥감을 몰 때 쓰는 듯한 빠르고 날카로운 비트음을 내며 춤을 추며 방문객을 환영한다.그 순간 무리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동양인이 그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어울렸다. 서툰 몸짓이었지만 이방인의 호응 만으로 그들의 몸짓과 괴성은 더 커지고 빨라졌다. 호텔에 머물던 외국인들과 한국 교포, 여행사 직원들도 빙 둘러서서 박수 치고 환호했다. 그들 모두를 하나 되게 하고 흥분시킨 것은 잘 훈련된 전통춤 공연단이 아니라 이방인 이었다. 탄하스님이다.

현지 한국인들은 익숙한 듯 반갑게 악수했다. 공연단 사이에서도 유명한 듯, 아주 친밀하게 대했다. 탄하스님은 호텔에서 뿐만 아니라 마사이족 마을을 방문할 때 마다 그들의 춤으로 인사했다. 그것은 그 어떤 말이나 손짓, 구호품 보다 그들을 기쁘게 하고 한 식구로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모르는 사람 없는 케냐 유명인

활달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에 처음부터 적응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서워 2 달간 혼자 외출도 못했다. 2014년 7월 케냐에 발을 디뎠다. 언어도 발목을 잡았다. 영어를 잘한다 해서 파견을 했는데, 케냐가 영국식 영어를 사용해 미국식 영어에 익숙했던 스님은 처음에 의사소통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두려움 때문에 두 달간 집밖으로 한 발짝도 못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원불교 교무가 나이로비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죽을 용기를 내서 나갔다. 시내버스를 타고 둘이서 손을 잡고 시내도 돌아다녔다. 자연스럽게 현지인들과 만나고 부딪혔다. 그렇게 조금씩 용기를 내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지금의 탄하스님을 보면 믿기지 않는 과거다.

탄하스님을 아프리카로 이끈 인연은 ‘오만과 편견’이다. 스님은 경북 의성에서 열심히 포교했다. 노인복지관도 운영하며 의성을 대표하는 스님이 되었다. 얼마나 신도가 많이 모였던지 국회의원 시장이 본사로 가지 않고 스님에게 왔다.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찾아오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생겼다. 문득 두려웠다. 끝없이 오만하고 위로 치솟는 자신이 두려웠다. 내려놓지 않으면 큰 일 나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인은 두렵고 야만적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어느 해 독일을 갔다가 베를린 역에서 흑인이 두려워 화장실을 못 갔다. 백인은 아무렇지 않은데 왜 흑인은 두려워하나 편견을 가진 것이 미안해졌다. 그러다 2012년 은사와 우연히 아프리카 여행 중 본드 부는 아이들을 만났다. 그 후 이들이 가슴에서 안 떠났다. 의성에서 포교가 절정에 달하고 오만한 마음에 두려움도 커질 무렵 미안한 마음도 씻고자 아프리카 행을 결심했다. 지구촌공생회를 후원하고 있어 월주스님이 아프리카에서 펼치는 사업을 알고 있었다.

탄하스님은 “봉사단원으로 가고 싶다고 이사장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지부장으로 가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관장으로 있던 의성노인복지관을 정리하는데 2년이 걸렸다. 스님은 아프리카에 오려고 2년간 고기 먹는 연습을 했다. “제가 고기 안 먹으면 젊은 친구들이 저를 어려워할 것 같아서 한국서 고기 먹는 연습을 했는데, 안 먹다 먹으니 속이 탈이나서 1주일씩 배앓이를 하는 등 많이 고통스러웠다. 그 덕분에 여기 와서 현지식도 무엇이든 잘 먹는데 브루셀라도 이들이 주는 음식을 먹다 걸렸다”며 웃었다. 탄하스님은 “이사장 스님께서 저를 케냐로 보내면서 불교 포교 할 필요 없다. 오직 주민들을 위해서 일 하라고‘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정말 고마웠고 힘이 됐다”고 말했다.

월주스님을 농장으로 안내하는 탄하스님.

불교 포교 않지만 포교 돼

그런데 불교를 내세우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스님을 통해 불교, 한국불교, 대한불교조계종을 바라보았다. 탄하스님은 “이곳은 기독교 국가다. 한국에서 전도사만 700명이 나와 있다. 나는 700대1을 대하는 셈이다. 나는 불교를 말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지만 그들은 나를 보면서 한국 불교의 모습을 보고 대한불교조계종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스님이 열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대하니 이 곳에 나와 있는 대사관 농촌진흥청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성직자와 신도들이 모두 스님을 좋아하고 불교에 대해 호감을 갖는다. 한국에서 온 속가 언니와 킬리만자로에 갔다 오는 길에 차가 웅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자 한 밤중에 5시간을 차를 몰고 구하러 온 전도사, 만오 중 고등학교에 모인 다른 종교 신자와 성직자들은 탄하스님이 이 곳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 온 월주스님과 후원자 일행을 위해 정성껏 점심 도시락을 보내준 분은 천주교 신자다.

스님은 교육 아이들과 놀이, 심지어 기사나 경비들과도 서스럼 없고 매사에 열정적이지만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관심 갖는 분야는 농업이다. 이사장 월주스님은 부임하는 탄하스님에게 반드시 농장을 성공시켜 케냐인들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자립 기반을 마련하도록 노력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스님은 “마사이족은 유목민이어서 정착 방법을 모른다. 집에서 쓰는 물을 모아서 텃밭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안한다. 물로 인해 염소 소가 수천마리 죽어도 이를 고칠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농장이 있으면 사료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을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삶이 있음을 배워 이들이 케냐의 미래를 바꾸도록 학교를 짓고 농장을 만들어 가르친다”고 말했다. 스님도 처음에는 아이들이 굶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급식비를 지원하려 했다. 지구촌공생회는 개인에게 돈을 주는 구걸형식의 지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반스님들의 지원을 받아 개인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농사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으며 탄하스님이 지금도 가장 정성을 기울인다.

인키니 농장은 그 첫발이다. 학교에 노는 땅이 있어 초등학교 2곳의 방과 후 학교로 농장을 개설했다. 아이들은 이 농장을 통해 농사 지어 먹고 살 수 있으며, 농작물을 팔아 학교 복지 기금을 만드는 등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되기 까지 스님의 노력과 정성이 지극했다. 2016년 삼성전자가 ‘사랑의 열매’에 위탁한, ‘나눔과 꿈 사업’에 공모해 당선됐다. 기금 1억원이 주어졌다. 지구촌공생회가 2200만원을 보태 세 학교에 드림 라인을 설치했다. 스프링클러는 필요 없는 곳 까지 물을 보내 낭비가 심한 반면, 이 시설은 작물 위에만 물이 떨어지기 때문에 물이 부족한 건기의 케냐에 적격이다.

농장에서 탄하스님, 지구촌공생회 조끼가 스님의 가사다.

 

농사일에 가장 큰 관심

농사는 주 정부에서도 관심을 갖고 많은 시도를 하지만 실패한 사업이다. 농사 기술 아이디어도 없고 소출이 적어 돈이 안되다 보니 쉽게 포기했다. 탄하스님은 농촌진흥청의 코피아 지원을 받아 기술을 가르치고 케냐 농림부와 연결해서 학교 교육으로 삼았다. 세금으로 공무 출장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공무원이 나오면 부른 측에서 돈을 부담해야한다. 교육비를 지구촌공생회가 댄다. 스님은 개인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옥수수 감자 마늘 한국 고추, 배추 무 등을 심었다 실패도 하고,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한인들에게도 팔기도 했으며 무말랭이를 한국 가서 팔기도 했다.

기독교 국가 케냐에서 스님이라 어려운 점이 없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스님이기 때문에 더 장점이 많다고 말했다. 스님은 “선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내국인들에게 요청하면 잘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신도든 도반이든 요청하면 바로 들어준다. 시주 받기가 쉽다. 한국에 한번 들어가면 여러 사람이 주는 차비가 활동비로 쓸 만큼 모인다. 한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다. 불교에 대해 케냐 고위층들은 잘 안다. 그리고 불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공항에서도 바로 패스시켜 주며, 나는 모르는데 저번에 봤다며 인사하고, 외국인들에게 바가지가 심한데 나한테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며 웃었다.

스님에게 힘든 일은 종교나 향수 병 같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 주민들 소원을 모두 들어주지 못할 때다. 스님은 “우물 하나를 파려면 5군데를 조사하면 4군데는 탈락이다. 떨어졌다고 하면 우리가 왜 떨어졌느냐, 우리 또 배아파야 하냐며 나와 같이 함께 울 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만해 중고교장과 파안대소 탄하스님.

스님들 관심 지원 기대

이사장 월주스님과의 5년 약속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귀국하는 것은 이 곳에서 얻은 풍토병 브루셀라 때문이다. 2년이 넘었는데 아직 후유증을 앓고 있어서 한국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돌아간다. 아직 한국에서 머물 곳도, 할 일도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스님들께 이 일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마음을 돌아보고 나를 알아차리는 공부하는데 이만한 것도 없다, 화를 낼 때 왜 화를 내는지, 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 상대방에게 설득력 있게 전해줘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하기 전에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나를 돌아보고 내려놓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험을 살려 승가대학이나 교육원 강의를 하고 싶다.”

스님은 기독교 국가에서 홀로 있다 보니 불교가, 부처님이 정말 소중하고 신심이 저절로 난다고 말했다. 스님은 “집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예불할 때 정말 소중하다. 장엄염불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나의 종교가 소중함을 느낀다. 그리고 포교를 하지 않지만 제가 사는 것 자체가 여기서는 포교다. 불교도 이렇게 큰 일 하는구나하며 ‘대한불교조계종’을 달리 본다. 케냐에서 지구촌공생회 덕분에 우리 조계종 위상이 대단하다. 불교 자체가 큰 대접을 받는다”며 특히 비구니스님들의 적극적인 관심 지원을 기대했다.

스님이 케냐에서 유명인이 되다보니 나이로비 대학 철학과에서 스님에게 불교 강의를 요청했다. 불교 강의할 교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내 영어 실력이 좋았다면 당장 강단에 섰을 텐데 아쉬웠다”며 “여기 사람들 동양 문화 철학 관심이 많은데 공부 많이 하고 영어 잘 하는 스님들 적극적으로 임하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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