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 진관사국행수륙재 봉행

사부대중 5000여명 동참
낮재 밤재 성대하게 거행
극랑왕생 국태민안 ‘발원’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라 할지라도 이 수륙의 성스러운 모임으로 인해 다 함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 불도(佛道)를 이루지 못한 이라할지라도 이 수륙의 성스러운 모임으로 인해 불도를 이루게 됩니다.”

서울 진관사 주지 계호스님(진관사수륙재보존회 이사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 ‘진관사국행수륙재(津寬寺國行水陸齋)’에서 개건대회소(開建大會疏)를 부처님과 대중에게 고했다.

진관사국행수륙재 제7재(회향)가 사부대중 500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지난 13일부터 14일까지 진관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성대하게 봉행됐다. 첫날인 13일에는 ‘낮재’가, 둘째 날인 14일에는 ‘밤재’가 진행됐다. ‘낮재’는 망자 한분 한분께 올리는 재이고, ‘밤재’는 수륙재의 공덕이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이웃은 물론 생명 있거나 없는 존재를 위한 재이다.

진관사국행수륙재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1397년 선대 왕실 조상을 비롯해 전란과 기근으로 세상을 떠난 영가를 천도하고 나라와 백성의 안락과 평안을 기원하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나라에서 행한다’는 뜻의 국행(國行)이 수륙재 명칭에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즉 진관사국행수륙대재는 조선 초 임금이 직접 참석한 국가 차원의 중요한 행사였던 것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한 권근(權近)이 저술한 <진관사수륙조성기>에는 “진관사에 3단(壇) 59칸의 수륙사(水陸社)를 지었으며, 임금이 몸소 행차하여 봉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진관사국행수륙대재 칠재에는 총무원 총무부장 정념스님, 전국비구니회장 육문스님이 직접 참석해 사부대중과 함께 유주무주 고혼의 극락왕생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발원했다.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총무부장 정념스님이 대독한 치사(致辭)에서 “일체의 차별을 배제한 무차대회인 진관사국행수륙재는 개별적인 천도를 넘어 국가 차원에서 주관해 온 공익적이고 공공적인 성격의 불교 종합 의례”라면서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온 생명의 평안과 세상 만물의 조화를 염원하는 큰 법석(法席)의 봉행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격려했다.

첫날 낮재는 연(輦)을 들고 일주문 앞에 나가 영가를 맞이하는 시련(侍輦), 먼 길을 온 영가를 위로하고 공양을 올리는 대령(對靈), 영가의 번뇌를 씻어주고 깨끗한 새옷을 갈아 입히는 관욕(灌浴) 등 전통의식이 진행됐다.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을 모시는 신중작법(神衆作法), 부처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상징하는 불화를 모시는 괘불이운(掛佛移運), 스님들이 아름다운 음악과 무용으로 환희를 표현하는 영산작법(靈山作法)이 이어졌다. 낮재의 마지막 순서는 조계종 전계대화상 성우스님이 법문을 설했다.

둘째 날 밤재는 부처님과 아난존자 및 아귀의 설화에서 수륙재가 비롯됐음을 밝히는 수륙연기(水陸緣起), 불보살과 고혼들에게 수륙재를 알리는 사자(使者)를 청하는 사자단(使者壇), 하늘의 다섯 방위를 관장하는 황제를 청하는 오로단(五路壇) 의식이 진행됐다.

이어 부처님과 보살, 영가들을 차례로 청하여 공양하는 상단(上壇), 중단(中壇), 하단(下壇)에 이어 마지막으로 불보살과 영가를 배웅하는 봉송회향(奉送廻向)으로 수륙재의 막이 내렸다.

서울 진관사는 매년 9월 첫째 주 일요일 입재한 후 토요일마다 초재에서 육재까지, 10월 셋째 주 주말에 칠재를 봉행한다. 해를 거듭하면서 스님과 불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과 문화재·의식 전문가들이 참여가 늘어 명실상부한 수륙재로 발전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