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을 꿈꾸며 지난겨울 고향에 작은 밭을 샀다. 당장 내려갈 여건이 안 되니 얼마간은 부모님의 손을 빌려 농작물을 심기로 했다. 

봄. 그 땅에 처음으로 참깨를 심었다. 모종을 심는 일 정도야 금방 할 수 있을 거라며 큰 소리쳤지만 불량한 허리를 가진 도시의 아들딸들은 반나절 만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 자판만 두드릴 줄 알았지 땡볕의 고향 밭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손들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작은 참깨 모종을 흙 속에 심는 것.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같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여름. 친정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가 온 지난 밤,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가 밭에서 참깨를 뜯어 먹으며 밤새 뒹굴었단다. 휴가를 얻게 되자 참깨 밭으로 달려갔다. 하얀 꽃을 피운 참깨가 어느덧 내 허리보다 높이 자랐고, 벌과 나비들이 분주히 이랑 사이를 날아다녔다. 밭두렁에 가만 서서 일렁이는 그 풍경을 보자니 스쳐가는 찰나의 생각들. ‘이 세상의 모든 농부가 생명을 심고 있었구나. 그 생명을 뿌리내리게 해 도시의 우리를 먹고 살찌우게 했구나.’ 그걸 이제야 알게 되니 부끄러웠다.

가을. 엄마는 거기서 한 가마니 반의 참깨를 수확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게 얼마 만큼인지 짐작도 못하는 맹추다. 엄마는 장날 방앗간에 가 깨를 볶아 기름을 짰다. 이후 나는 냉장고에서 참기름을 꺼낼 때마다 늘상 지난여름 깨밭의 정다운 풍경과 묵묵히 깻대를 베어내던 아버지와 뒤에서 그걸 묶으며 따르던 엄마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속에서 자꾸 솟아나는 질문들. ‘이 참깨는 무엇인가. 이 참깨는 누구의 것인가.’ 깨를 키운 것은 햇살과 바람, 비와 이슬, 농부의 손길이다. 그렇다면 참깨는 내 것인가, 아버지 것인가, 멧돼지 것인가, 바람의 것인가. 나비와 벌의 것인가. 108배를 하면서 나는 내 입으로 들어가는 참깨 한 알이 우주만물 모든 것과 인연 닿아있던 결정체며 한 세계였다는 사실을 되짚었다.

겨울. 나는 참깨를 먹을 것이다. 봄에 참깨를 심었기 때문에 참깨를 먹을 수 있다. 콩을 심었다면 콩을 얻었을 것이고, 팥을 심었다면 팥을 얻었을 것이다. 내가 참깨를 심었는데 거기서 들깨가 날 수 없고, 도라지나 산삼이 날 수 없다. 내가심은 대로 고스란히 나한테 돌아왔다. 우리 삶이 이와 똑같을 터. 마침내는, 뿌린 대로 거둔다.

[불교신문3432호/2018년10월17일자] 

전은숙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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