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환스님이 걸어온 길

인환스님에겐 별명이 있었다. ‘전국구’와 ‘지하철 도사.’ ‘전국구’는 1996년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교육을 멈추지 않은 스님의 근면을 상징한다. 전국의 불교대학을 돌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 앞에서 법석을 열었다. 

‘지하철 도사’는 검소했던 삶을 보여준다. 법문을 하러 갈 때에는 언제나 지하철을 탔다. 스님은 2005년 4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듯 돈도 허투루 쓰지 말자는 것이 지론”이라며 “최대한 아끼고 남은 시간과 돈은 중생의 몫이기에 게으르거나 검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스님은 실향민이다. 1931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1949년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월남한 스님은 1952년 부산 선암사에서 원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격하면서 존재의 무상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게 출가의 변이다. 자운스님에게선 비구계를 받았다. 석암스님과 자운스님, 근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율사(律師)들이다. 제자의 진로 역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계율을 전공해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신라의 계율사상 연구>를 주제로 한 논문을 완성해 스님으로는 최초의 ‘도쿄(東京)대 박사’가 되는 영예를 얻었다. 계율을 학문적으로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지켰다. 석암스님을 처음 만난 날, 새벽예불을 마치고 108배를 한 뒤 밥을 짓는 후원 일을 보았다. 그때 시작한 108배를 평생토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왔다.

스님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제대로 수행정진하려면 반드시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생활이 반듯해야 참선도 잘 되고 마음도 반듯해지기 마련이죠. 그러나 계율을 위한 계율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단지 계를 지키기 위해 지키면 집착이죠. 내 본연의 리듬에 맞춰 살며 쓸데없는 데 마음을 쓰지 않고 일념을 유지하자는 것이 진정한 계율의 정신입니다.”

인환스님은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라는 직함이 가장 낯익다. 일본의 대학에서 객원교수로도 조계종 국제포교사로도 활동하며 해외를 누비기도 했다. 평소 제자들에게 ‘글은 발로 써야 한다’고 주문해온 점이 이채롭다. “현장을 찾아가 직접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이나 평가만으로 연구를 진행하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스님의 법명은 인환(印幻). 석암스님이 지어주었다. 도장 ‘인’에 꼭두각시 ‘환’. “중노릇 잘 하려면 이 세상이 참으로 무상한 줄 확실하게 느껴야 올바른 발심을 하는 것이다. 무상한 줄을 의심 없이 바로 알게 될 때 변함없이 중노릇을 잘할 수 있는 것이다.” 교수로 재직할 때 받은 월급과 퇴직금, 그리고 경향 각지에서 법문을 하고 받은 보시금을 차곡차곡 모아 모교인 동국대에 보시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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