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위해 분투하지 않으면 서광은 소각된다”

전장헌 스님 독립선언문 전달
우곡리 장날 ‘만세운동’ 도모
비밀리에 태극기 4매 만들어
27명 강제 연행돼 고초 겪어

문경 김룡사 대웅전과 경내 전경.

1919년 4월 13일 일요일 문경 운달산 김룡사의 젊은 스님과 학생 30여 명이 산문(山門)을 나섰다.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의미 있는 날이었다. 태극기를 몰래 숨긴 스님들은 운달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일본 경찰이 주둔한 대하주재소(大下駐在所) 근처에서 조선독립을 외치기 위해서였다. 이날은 우곡리 장날로 시위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지금은 직지사 말사(末寺)이지만, 일제강점기 김룡사는 전국 31본산(本山) 가운데 하나였다. 50개 말사를 둔 큰절로 지방학림(地方學林)을 운영하며 젊은 스님과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달여 앞서 서울에서 벌어진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김룡사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은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면서 의기투합했다.

그해 3월25일 불교중앙학림에 다니던 전장헌(錢藏憲) 스님이 독립선언문 한 장을 구두 밑창에 몰래 숨겨 김룡사에 잠입했다. 지방학림 스님들에게 독립선언문이 전달되면서 만세운동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전장헌 스님은 김룡사에서 장학금을 받아 서울로 유학한 인물이다.

문경 김룡사 공비생(公費生)으로 김룡사의 젊은 스님들과 막역한 사이였던 전장헌 스님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 상황을 전했다.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한 일경(日警)이 김룡사 스님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것은 당연했다. 때문에 전장헌 스님은 이튿날 급히 서울로 돌아갔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문경 김룡사 대웅전 앞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3.1만세운동 소식을 알게 된 김룡사 지방학림 스님들과 학생들은 비밀을 유지하며 동지를 규합했다. 송인수, 성도환 스님이 주도했다. 4월 11일 오후 7시 기숙사(寄宿舍)로 사용하는 요사(寮舍)에 모인 송인수, 성도환, 최덕찰 스님 등 10여명은 만세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4월13일 수업이 끝난 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날 사용할 태극기 4매를 비밀리에 만들었다. 주민들에게 나눠줄 독립선언문도 필사(筆寫)했다.

당시 2년제로 운영되던 김룡사 지방학림에는 말사에서 온 공비생 스님들과 일반 학생 등 8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일반 학생들은 신학문을 배우려는 불교 신도들의 자제였다. 문경은 물론 상주, 예천 등 주변 지역에서 온 젊은이들 이었다.

산문을 나선 김룡사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은 대하리를 향해 걸었다. 절에서는 약 10km 정도 거리이다. 걸어서 1시간 30분내지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김룡사 지방학림에 다녔던 민동선(閔東宣) 스님은 훗날 “태극기, 독립선언문, 경고문(警告文)을 감춰 절을 나섰다”면서 “30명이 1개의 단(團)을 구성했다”고 증언했다. 지방학림 재학생이 80여명이었으며, 1개단이 30명임을 감안하면 기존 18명이 참여했다는 기록과 달리 많은 인원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날 김룡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행진은 중도에 멈추고 말았다. 스님과 학생들이 우곡리 석문(石門) 인근에 도달했을 때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김룡사 주지 김혜옹(金慧翁) 스님이 조랑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기 때문이다. 혜옹스님은 김룡사 지방학림 교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스님은 학생들을 가로 막고 사찰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일부 기록에는 “학생들을 윽박질렀다”고 하지만, 젊은 스님과 학생들의 피해를 염려하여 귀사(歸寺)를 종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룡사 대웅전 앞에 자리한 정료대(庭燎臺). 횃불을 피우기 위한 기둥 모양의 대(臺)이다. ‘○○十五年 (○○15년) 庚辰(경진) 十月日(시월일)’이라 적혀 있다. ○○은 일본 연호인 ‘昭和(소화)’를 없앤 자리이다. 소화 15년은 1940년이다.

혜옹스님의 간청을 받아들인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은 사찰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과 학생들의 거사 정보를 확인한 일본 헌병이 다음날 김룡사에 들이 닥쳤다. 수업 중이던 스님과 학생들을 한 곳으로 몰아놓은 뒤 가담자를 색출했다. 이날 27명이 밧줄로 손이 묶인 채 문경헌병대로 연행됐다. 10일간 모진 고초를 겪은 뒤에야 24명은 풀려났다. 하지만 송인수, 성도환, 김훈영 스님은 재판에 회부되어 형(刑)을 받았다.

이 가운데 김훈영 스님에 대한 흔적이 <동아일보>에 전한다. 1920년 7월31일자 <동아일보>에는 ‘불교학생 설화(舌禍) - 통일론(統一論)을 하다가 강연까지 못하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김훈영 스님은 6월26일 오후9시 예천불교포교당에서 “우리 민족의 과거 력사(역사)가 광휘(光輝, 환하고 아름답게 빛남)할 때에는 우리가 잘 통일되었을 때요, 금일과 가치(같이) 조선 사람이 쇠퇴한 것은 사회가 통일되지 아니하고 반상(班常, 양반과 상인) 사색(四色, 조선시대 붕당)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연했다. 강연 내용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이라 판단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튿날 석방됐다.

한편 1998년 향토사학자 최병식씨(당시 70세, 문경문화원 연구위원)는 <불교신문>을 통해 김룡사 만세 사건에 대한 구술 자료 등을 공개했다. 최병식 씨는 1990년대 후반 별세한 김룡사 지방학림 출신의 김철 씨와 민동선 스님의 회고를 채집했다. 4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한 것은 당시 산북면사무소 소재지인 한두리 장날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김룡사 보장문(寶藏門). '부처님 가르침이 담겨있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만세운동을 벌이기 위해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이 이곳을 지났을 것이다.

전장헌 스님이 갖고 온 독립선언문을 필사(筆寫)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증언도 청취했다. 또한 거사일에는 수업을 마치고 산문을 나선 것이 아니라 아침공양 직후라는 사실도 밝혔다. 이튿날 문경읍 헌병대에 체포된 지방학림 스님과 학생들이 석봉리 새목재를 넘을 때 동네 사람들이 나와 지켜보았으며, 먼발치에 있던 농민들이 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농민들은 헌병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심하게 당했다. 최병식 씨는 2002년 문경문화원에서 발간한 <문경문화>에 ‘김룡사 지방학림의 만세사건’이란 글을 발표했다.

비록 만세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김룡사 스님들의 항일(抗日)정신은 퇴색하지 않았다. 1895년 10월 을미의병(乙未義兵)으로 봉기한 이강년(李康秊, 1858~1907) 부대가 주둔했던 사찰이 김룡사이다. 무과에 급제한 무관 출신의 이강년은 13년간 문경, 단양, 강릉, 백담사, 청풍 등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안타깝게도 1908년 7월 총알을 맞고 체포되어 그해 10월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에는 김룡사 지방학림의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단순한 교육적인 기능 외에도 1919년 3‧1운동 당시 이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방학림이 얼마나 성황(盛況)이었는지는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1921년 당시 입학생이 증가하여 일반학생을 받을 수 없어, 확장을 위해 고심한 흔적이 나타난다.”

■ 김룡사 만세 권유한 전장헌 스님

김룡사 만세 의거와 관련된 인물들의 자취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갖고 와 김룡사 지방학림 학생들에게 전달한 불교중앙학림 전장헌 스님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김훈영 스님의 신문 기사가 전할 뿐이다.

1920년 6월9일자 <동아일보>에는 ‘중앙학림(中央學林) 전장헌’ 명의로 ‘동아일보군(東亞日報君)’이란 제목의 기고가 실려 있다. 소속 학교가 ‘불교중앙학림’과 ‘중앙학림’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같은 인물이 가능성이 크다.

이 글에서 전장헌 스님은 “아! 동아군, 군은 진실노(로) 우리 반도사회에 신서광(新曙光)을 배부(背負, 짊어진)한 군”이라면서 “반도의 민족을 위하야 분투하고 노력치 아니하면 우리의 서광은 자연히 소각될 것이오”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을 감안할 때 ‘민족을 위해 분투하라’는 전장헌 스님의 외침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1920년 9월 9일 조선불교청년회 김룡지회(金龍支會)와 동경유학생강연단(東京留學生講演團)이 김룡사 만세루에서 개최한 강연회 사회를 전장헌 스님이 봤다는 기록도 전한다.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고등경찰요사>, <동아일보>, <문경문화>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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