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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오늘날 우린 ‘원효’가 필요하다

기사승인 2018.11.26  14: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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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조계종 화쟁위원회, ‘원효의 발자취 순례’

원효의 사상·이론적 업적 보다 인간적인 삶에 집중하는 순례가 마련됐다.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지난 23일부터 2박3일간 경북 경산과 경주 등지에서 마련한 '원효의 발자취 순례'에 함께했다. 경주 월정교를 향하고 있는 순례단의 모습.

불교를 넘어 세간에서도 화쟁(和諍)은 매력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4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주최로 열린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한 기원법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를 위한 해법으로 ‘화쟁 사상’을 언급하며 가치를 일깨운 게 계기다.

정작 불교계에선 여전히 화쟁을 잘 모른다. 더러 아는 사람도 단지 ‘다툼을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머무른다. 더욱이 화쟁을 주창한 원효스님에 대해서는 ‘해골물 설화’ ‘요석공주와 아들 설총’ 말고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그의 사상·이론적인 업적 보다 인간적인 삶에 집중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지난 23일부터 2박3일간 경북 경산과 경주 등지에서 준비한 ‘화쟁의 원류를 찾아-원효의 발자취 순례’에 함께 했다. 전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스님을 비롯해 다큐멘터리 ‘원효를 만나다’의 김선아 감독 등 20여 명의 스님과 재가자들이 동참했다.

원효가 태어난 자리에 지어졌다는 ‘제석사(帝釋寺)’는 작은 사세에도 불구하고 원효성사탄생비와 원효를 모신 원효성사전이란 법당도 있다. 제석사 내 원효성사탄생비 모습.

“초인적 모습 부각하려 인간적 원효 가려져…"

순례단이 가장 먼저 발길을 향한 곳은 경북 경산이다. 원효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지역이다. 원효가 태어난 자리에 지어졌다는 ‘제석사(帝釋寺)’와 원효의 생가로서 처음 출가의 뜻을 펴고 사찰로 만들었다는 ‘초개사(初開寺)’를 잇달아 찾아갔다.

제석사는 주택가 한복판이 자리 잡고 있다. 사세는 작지만 ‘원효성사탄생비’와 ‘원효성사전’이란 법당도 마련돼 있다. 원효의 어머니 사라부인이 유성을 품에 안는 태몽을 꾸고 원효를 잉태해 만삭이 되었을 때 이 터를 지나가다 산기를 느껴 해산 했다고 한다. 그때 하늘에서는 오색구름이 내려와 땅을 덮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부처님의 탄생설화와 비슷하다. 원효의 어머니 사라부인도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처럼 원효를 출산한 후 숨을 거뒀다고 한다.

원효가 태어난 자리에 지어졌다는 ‘제석사(帝釋寺)’는 작은 사세에도 불구하고 원효성사탄생비와 원효를 모신 원효성사전이란 법당도 있다. 제석사 내 원효성사전 모습.

반면 초개사는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의 좁은 산길을 15분 여 올라가야 나온다. 일주문을 ‘화쟁문’으로 명명한 게 눈길을 끈다. 이 문을 지나면 경산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마당이 나온다. 원효의 아들이자 신라의 대학자인 ‘설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대웅전 내부엔 원효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원효의 생가로서 처음 출가의 뜻을 펴고 사찰로 만들었다는 ‘초개사(初開寺)’는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의 좁은 산길을 15분 여 올라가야 나온다. 초개사를 향해 올라가는 순례단 모습.

제석사와 초개사는 공통적으로 원효의 탄생과 관련된 곳이란 걸 뽐내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이를 바라보던 순례단은 의구심을 쏟아낸다.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면모가 너무 뛰어나서 초인적 모습와 ‘카더라’라는 설화적 요소만 드러날 뿐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은 부족한 것 같다. 그 부분이 가장 불교적인 ‘보살행’을 살았던 원효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 같다.(임완숙 전국교사불자연합회 명예회장)”

초개사 일주문인 화쟁문을 지나면 경산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마당이 나온다. 초개사를 살펴보는 순례단 모습.

원효는 ‘무애사상’이라 칭하며 스스로 일체의 걸림이 없이 살기 위해 승복까지 벗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정작 후대인들이 그를 다시 분별 안에 가둬두려 하는 것 아닌지 참가자들 사이에서 걱정이 새어나왔다.

해골물의 깨달음, 그리고 분황사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서 해골에 괸 물을 마신 뒤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깨달음을 얻은 ‘해골물 설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모든 진리는 마음 안에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을 깨우친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다.

해골물로 진리를 깨달은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이곳 분황사로 돌아와 자신이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방대한 양의 저서를 냈다. 현재 분황사에는 국보 30호 모전석탑만이 반기고 있다.

경주 분황사(芬皇寺)를 주석처로 삼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방대한 양의 저서를 냈다. 현재에 전해져 내려오는 건 20여 종 밖에 없지만, 기록으로 살펴봤을 때 80여 종 200여 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원효는 한 번도 한반도를 떠난 적이 없지만, 책으로 알려진 그의 사상은 중국 일본을 넘어 인도까지 전해진다.

순례단이 찾아간 분황사에는 국보 30호 모전석탑만이 우두커니 서 반기고 있었다. 원효를 기리기 위해 고려 때 세워졌다는 ‘화쟁국사비’의 받침 이외엔 원효를 기억할 수 있는 접점이 부족해 보인다.

“주막 가서 술 먹는게 자유?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가 중요”

‘원효 순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장소는 무엇보다 월정교와 요석궁이다.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으로 들어간 원효는 ‘요석공주’와 사흘을 보내고 아들 ‘설총’을 낳는다. 이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는 무성하다. 다만 둘 사이에서 나온 설총은 실존 인물이니 원효와 요석공주가 동침한 건 사실로 보인다. 요석공주와 사흘을 보낸 원효는 승복을 벗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칭하며 대중 포교에 진력한다.

월정교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순례단 모습.

실제로 본 월정교는 당시 모습을 복원하려 한 것 같으나 인위적인 느낌이 났다. 요석궁은 이름 그대로를 간직한 채 고급 한정식 식당으로 운영 중이다. 순례단은 이곳을 한참 동안 거닐며 그 날의 원효를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대중포교에 나선 원효의 ‘자유로운 모습’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김선아 감독은 구체적으로 원효의 자유를 ‘박애(博愛)’로 설명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춤과 노래로 삼국환란의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에 아픔을 치유한 것은 결국 ‘박애정신’이 바탕이라는 것이다.

원효와 요석공주가 사흘간을 보냈다는 요석궁은 현재 고급 한정식 식당으로 바뀌었다. 요석궁을 바라보는 도법스님 모습.

반면 도법스님(전 화쟁위원장)은 근원적인 마음에 초점을 맞췄다. 주막이나 기생집에 드나들며 술 먹고, 저잣거리에서 춤추고 기이하게 살았던 모습이 원효의 자유로운 모습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어디서나 주인 된 자세로 살면 그곳이 곧 진리의 경지라는 임제(臨濟)선사의 명언이 여기서도 통용됐다.

특히 도법스님은 원효 사상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할 것을 주문했다. 그래야만 화쟁사상을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다. 나아가 ‘지금 우리에게 원효가 필요한 이유’를 전달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 집단의 이익과 진영 논리에 빠져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혹여나 그 진실이 상대방에게 유리하게 작용돼 내가 지게 될까봐. 하지만 이런 모습을 철저하게 깬 것이 최근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이다. 남북 정상은 과거의 시비를 거두고 지금 당장 필요한 ‘평화’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이 화쟁의 현대적 모습이다. 지금까지 원효가 한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제야 비로소 그런 환경이 조성된 것 같아 보인다.”

순례단은 ‘골굴사(骨窟寺)’와 ‘기림사(祇林寺)’를 끝으로 3일간의 순례를 마쳤다. 그러면서 ‘원효 순례가 정례화 됐으면 좋겠다’는 한결같은 소회를 전했다. 골굴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순례단 모습.

그래서 지금 원효가 필요하다

순례단은 화랑의 무예인 선무도의 총본산으로 원효가 열반한 혈사로 추정되는 ‘골굴사(骨窟寺)’와 말년에 주석했던 곳으로 알려진 ‘기림사(祇林寺)’를 끝으로 3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원효 순례가 정례화 됐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전했다.

단 한번으로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일성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아직도 한국사회는 방황하고 다투고 갈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치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 패권을 두고 전쟁을 일삼았던 1400여 년 전, 원효가 살던 그 시대처럼.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원효가 필요하다.

경산·경주=이성진 기자 sj0478@ibulgyo.com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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