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인연'은 연기에 따라 흘러가는 그림이다"

재미변호사이자 수필가인 김지영 변호사가 '불교로 읽는 피천득'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고 있다.

 강연자 : 김지영 재미변호사

피 선생님은 설움을 구름에 빗대었다
생사든 설움이든 연기에 의해
생기고 사라지는 유위법인다
구름과 파란 하늘을 넘어 허공을 쳐다보며
스러지는 것들을 통찰한다

‘한국 수필문학 정수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금아 피천득선생기념회가 주최하고 서초문화재단이 주관한 ‘피천득 다시읽기’ 강좌가 지난 10월 말부터 11월 8일까지 개최됐다. 지난 11월 8일 강좌에는 재미변호사이자 수필가인 김지영 변호사가 ‘불교로 읽는 피천득’이라는 주제강연을 펼쳤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

오늘 이야기는 인연으로 시작해서 <인연>으로 끝납니다. 인연. 물론 불교적인 말이지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일체 법의 작동 원리인 연기(緣起)의 과정 또는 결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래서 영어로 ‘dependent origination’ 또는 ‘dependent arising’이라고 번역됩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뵙는 인연은 제 인생에서 네 가지 상황이 없었으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첫째, 1971년 대학 3학년 때 피천득 선생님의 영시 강의를 들은 일입니다. 둘째, <피천득 평전>의 저자이시며 저를 이 모임에 초정해 주신 정정호 교수님이 저와 같은 과, 서울대학교 사범 대학 영어과를 같은 해에 졸업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제가 2013 지독한 마음의 상처가 있어서 불교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넷째, 제가 하는 일은 변호사이지만,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훈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 이야기의 끝은 피선생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입니다. 수필 인연을 불교의 인연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피 선생님의 글 중에서 ‘오월’, ‘인연’ 이라는 수필 두 개와 시 ‘무제’라는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피 선생님은 ‘오월’ 이라는 수필에서 불교의 사성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중 고성제를 말씀하십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보통은 여기까지 인용합니다. 오월, 청춘, 시작에 관한 예찬의 글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스물 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이 단락에서 이 수필의 톤이 바뀌죠. 스물 한 살 청년의 외로운 마음이 드러납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이 두 구절, 피 선생님의 불교적 사유의 궤적입니다. 사성제 중 첫째, 고성제 이야기 입니다. 일체개고, 모든 것이 괴로움이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면 인생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은 억울하고 어려운 중노동 수용소에서도 살아가지만, 그것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인공 슈코프는 종교적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시인 장경린은 그의 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슈코프에게 하루를 999시 9999분까지 늘려줍니다.

고성제를 깨달을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지요. 인간의 고통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랑하는데 만나지 못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미워하는 데 만날 수 밖에 없는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는 데 얻을 수 없는 구불득고(求不得苦 ),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오음성고(五陰盛苦) 등 인생의 여덟 가지 아픔이 있지요.

피 선생님 수필 속의 중국 시인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프다”라는 당연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 “사랑을 얻는 것 또한 아픔”이라는 심오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평소 좋은 일,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부처님의 깨달음에 따르면 괴로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즐거움도 그대로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거기 매달리는 나를 두고 흘러가 버립니다. 그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입니다. 한번 받은 축복에 한없이 매달리는 것이지요. 그것을 깨닫는 것이 두번째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집착에서 괴로움이 일어나는 줄을 깨달으시고 그 집착의 독에서 벗어나는 해독제도 찾아주십니다. 그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 나를 포함한 일체법이 무아 (self-less)라는 깨달음입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나라는 생각을 빼면 그것이 열반, 해탈입니다. 세번째 성스러운 진리 멸성제입니다. 나에게서 나를 빼라.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시 중에 ‘녹아내리는 눈처럼’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Wash yourself of yourself.” 겨우내 쌓인 눈이 봄 볓에 녹는 광경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햇볕을 받은 눈이 녹아 물이 생기고 그 물 때문에 남아 있는 눈이 녹아 버리고, 마침내는 눈은 없어지고 물이 되어 흘러가지요. 해탈, 그것은 나에게서 나를 자꾸 빼다 보면 남은 게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아, 공입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중생들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존재이자 실존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나’가 없습니다. 중생들이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여러가지 인연들이 생겨나고 얽혀져서 만들어낸 일시적 결과로 변하지 않는 나로서의 자성이 없다. ‘Self-less’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연기의 법입니다. 모든 것이 연기이기 때문에 비어있다. 즉 공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대승불교에서 가르치는 공사상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증시색’이야기지요.

사성제 중 네 번째 도성제는 ‘나에게서 나를 빼버리는’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에 대한 안내입니다. 팔정도, 여덟가지 바른 길을 따라가면 해탈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피 선생님은 ‘무제’라는 시에서 무위 허공을 봅니다.

“설움이 구름같이/피어날 때면/높은 하늘 파란 빛/쳐다봅니다./물결 같이 심사가/

일어날 때면/넓은 바다 푸른 물/바라봅니다.”

첫째 연의 높은 하늘, 그것을 담고 있는 허공이 있습니다. 허공은 그리스 신화 첫 머리에 등장하는 ‘Big Void’, 크게 텅 빈 자리입니다. 그리스어로 카오스, 오늘 날 영어로 ‘chaos’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허공은 원래부터 있는 텅 빈 자리입니다. 거기에 하늘도 들어가고 세상의 삼라 만상이 다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조용필의 허공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또한 “설레이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묻어 버려야 할 그 허공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허공이나 둘 다 스스로가 그러한 무위의 자리입니다. 무위, 연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자리입니다. ‘무위’에 대응하는 ‘유위’의 자리도 있습니다. 인간도 세상의 모든 것들도 연기에 의해 생겨나는 ‘유위’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역로여로전(如露亦如電)/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금강경>의 사구게입니다. 모든 유위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보라 같고, 그림자 같다.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마땅히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연기가 만들어 낸 인생 그리고 삼라만상에 대한 무엇인가 있다는 굳센 착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아쉽지만’ 인생은 유위,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인연 따라 스러집니다.

피 선생님께서는 설움을 구름에 빗대었습니다. 생사든 설움이든 연기에 의해 생기고 사라지는 유위법입니다. 피 선생님께서는 구름을 넘어 파란 하늘 넘어 허공을 쳐다보는 것으로 스러지는 것들을 통찰하십니다.

피 선생님은 물결 같이 일어나는 심사를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처럼 실체가 없는 현상으로 관, 즉 바라보십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작여시관에서 ‘관’은 ‘지혜로 통찰한다’는 뜻입니다. 반야의 지혜로 반조하시는 것입니다.

수필 ‘인연’은 연기에 따라 흘러가는 그림입니다. 선생님께서 열입곱에 처음 만난 아사코, 서른 하나 둘 쯤에 두번째 만났고, 그리고 44세에 마지막으로 만난 이야기, 그 이야기를 환갑이 지나서 회상하시는 글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사코와 이생에서 세번의 만남으로 끝난 인연을 아쉬워하십니다. 세번째 만남에 대해서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후회를 하십니다.

피 선생님께서는 아사코와의 인연이 어떻게 전개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세 번째 만남을 위해 가는 길에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이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와 같은 집에 살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십니다. 두 번의 아름다운 만남의 행복보다 ‘뾰쪽 지붕에 뾰쪽 창문이 잇는 작은 집에서’ 아사코와 함께 사는 인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서운해하십니다.

‘인연’에서 ‘인’은 직접적 원인이라고 합니다. ‘연’은 간접적 원인, 조건들이 되겠지요. 예를 들어 씨앗에서 복숭아 싹이 트는 것을 생각하면, ‘인’은 복숭아의 DNA를 가지고 있는 씨앗이겠죠. ‘연’은 적당한 수분과, 토양, 햇빛 등입니다. ‘연’이 맞지 않으면 ‘인’이 있어도 복숭아 나무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인’만 가지고 안됩니다. ‘연’의 한자는 옷을 꿰메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비단 옷감 들이 널려 있어도, 재단을 하고 조각을 맞추고 실로 꿰매지 않으면 비단 옷이 되지 않습니다. 피 선생님께서는 아사코와 이루어 질 수도 있는 사랑의 마음은 가졌지만, 그 마음을 엮어가는 행위, 업을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인을 꿰매는 연을 짓지 못하셨습니다. 불교에서 인연이라는 말은 수동적으로 주어진 조건들이 연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연기의 마디마디에 누군가가 능동적인 업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연기, 인연은 운명론과는 다릅니다.

피 선생님의 ‘인연’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아쉬움으로 읽기보다는, 흘러간 세월의 장면들을 세번의 만남을 중심으로 몇개의 정지 화면으로 보는 연속 그림 엽서처럼 읽고 싶습니다.

‘인연’에서 피 선생님은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라는 소설을 두 번 언급하십니다. 아사코와 두 번째 만남에서 “새로 출판된” 그 책 이야기를 했고, 세 번째 만남 “백합같이 시든” 아사코의 얼굴을 본 순간 10연년 전에 이야기했던 <세월>을 생각합니다. ‘인연’도 결국은 흘러가는 세월, 제행무상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멘트 “아니 만났어야 했을 것”이라는 말은 선생님께서도 아직 집착을 버리시지 못했다는 고백입니다. 아직 해탈을 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나도 그래”라고 하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언입니다. 그런 아쉬움을 품고 가는 것이 사바세계의 세월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인연’에서의 세 번째 만남, 피 선생님께서는 아사코를 직접 보기 전에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아사코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아사코의 남편이 일본계 이세 미국인이라는 이야기도 들으셨겠죠. 그 순간 아마도 피 선생님 마음속에 ‘시들어 가는 백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사코를 보았을 때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모두 마음의 그림일 뿐 (一切唯心造).

버지니아 울프도 <세월>에서 일체유심조(the world is nothing but thought)이야기를 합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자신도, 내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만물도 공이라는 반야부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오는 의문 ‘여기 있는 나는 뭐냐? 여기 보이는 이것은 무엇이냐?’에 대한 <화엄경>의 대답이 일체유심조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그려내는 그림일 뿐이다라는 의미이지요.

피 선생님께서는 젊어서 금강산에서 불교 공부를 하셨다고 합니다. <유마경>, <금강경>, <법화경> 등 대승 경전을 접하셨습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 울프의 <세월>을 읽으면 앞에 인용한 “The world is nothing but thought” 라는 구절이 눈에 딱 들어올 것입니다. 피 선생님께서도 이 문장을 당연히 ‘일체유심조’와 연결을 시키셨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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