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 희고, 붉은 찰나의 시간

#1

주말이면 자동차로 주차장이 되는 서해안 고속도로도 서해대교를 지나 당진을 넘어서면 여유 있는 속도를 회복하는데 오늘처럼 폭설이 내리는 날은 길이 열려 있어도 달릴 수 없다. 눈 걱정에 거북이 속도로 가면서도 서산IC를 빠져나와 개심사 이정표를 보고 방향을 틀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쩌면 하얗게 내린 눈 탓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대관령 같은 느낌의 서산목장도 온통 눈 세상이었다. 목장길이 길게 펼쳐진 국도변에 잠시 자동차를 세우고 길을 따라 걸으면 언덕을 덮은 겨울 빛에 나른해졌다. 다시 차로 몰아 달리면 신창저수지의 푸른색을 만날 수 있다. 쏟아지는 눈과 푸르고 고요한 저수지는 눈꽃으로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개심사를 만나기 전 애피타이저였다.

#2

개심사는 서산시 운산면 상왕산 기슭에 있는데 시골 마을길을 잠시 오르면 일주문을 우선 만나게 된다. 차분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으며 짙은 소나무 향을 맡다보면 나지막한 돌기둥에 개심사입구(開心寺入口), 세심동(洗心洞)이라고 쓰인 곳에 도착한다. 마음을 씻는 곳이라는 소박한 표지석을 보면 이래저래 무거워진 마음이 어느새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오르는 산길은 가파르지 않아 동행이 있다면 담소를 나누며 올라도 숨이 차지 않고, 혼자라면 사색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 

#3

산을 오른 열기가 몸을 조금 데울 때쯤이면 사찰 입구 연못 앞이다. 연못 중앙에 무심하게 만들어 둔 외나무다리에 눈이 쌓여 미끄러울 것 같아 조심스럽게 첫 발을 디뎠다. 경내로 들어서며 연못에 자신의 참모습을 비춰보고 정갈한 마음을 찾아봤다. 봄이면 겹벚꽃과 매화, 모란으로 가득해지는 이곳이 눈꽃으로 가득했다. 돌계단을 올라 대웅보전이 있는 절 마당에 들어서니 쏟아지는 눈 속의 소박한 탑과 석등이 합장한 노스님처럼 서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여느 큰 절집처럼 우쭐대거나 사람의 기운을 압도하지 않아 편안한 시골집을 찾아온 듯 겨울의 여유를 누리게 했다.

#4

대웅보전이 보이는 전각 댓돌에 앉아 눈 구경을 하다가 오른쪽 작은 문을 지나 지장전과 삼신각을 둘러보고, 삼신각 뒤로 산길을 오르면 멀리 바다가 보이고 개심사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 탁 트인 그곳에 서서 2019년 새로운 시작을 떠올렸다. 시작과 동시에 조급해지고 답답해진 마음을 꺼내 맑은 공기에 씻고 더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을 갖다보니 입구에서 본 ‘세심동’이란 글이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님을 알았다. 

배종훈(https://www.facebook.com/jh.bae.963)  

[불교신문3454호/2018년1월9일자] 

배종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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