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생명 재미로 잡아먹는 살육축제가 만연하고…

“불교에서 모든 생명이란
자본·재화의 가치 넘어선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 

육제를 소제로 바꾼 지공스님 
바로 알면 올바른 실천 가능 

생명 경시 희생 막기 위해
“불교적 동물윤리” 작동해야

동물권단체인 ‘케어’의 박소연 대표가, 상황에 따라 동물을 집단으로 안락사시켰다는 내부고발로 불거진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다. ‘인간이 동물의 생명을 수단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인류문명의 오래된 화두 중 하나이다.

불교의 생명존중

2011년 1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구제역 종식 발원 및 희생동물 천도재’. 당시 많은 불자들이 참석해 살처분 된 동물들을 추모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요즘도 간혹 우리는 ‘개값을 치른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개의 죽음은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적정한 보상만 하면 면책된다는 의미다.

과거 동물이란, ‘야생동물’과 ‘가축’의 두 가지로만 구분됐다. 앞선 ‘개값’의 표현은 개를 가축의 범주에서 보기 때문에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축 중에서, 개와 고양이 등이 반려동물로 특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1인 가구의 증대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동. 그리고 도시인의 고독과 소외의 해소방안으로 반려동물이 대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반려동물은 일부에서는 가족 구성원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해서 반려동물에게 ‘아들’이나 ‘딸’, 또는 ‘우리 애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고, 겸상을 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실제로 반려동물의 병원비나 미용비용이 사람보다 더 드는 경우도 다수 있다. 또 불교적으로는 반려동물의 천도나 49재의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도 간혹 목도된다.

반려동물의 높아진 위상은 우리로 하여금 동물윤리와 동물권에 대한 인식을 재고케 하고, 더 나아가 수단화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하고 있다. 벌써 1세대도 더 지난 1988년 올림픽 때, 우리의 ‘보신탕 문화’가 유럽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일이 있었다. 우리는 이를 문화상대주의를 고려하지 않은 유럽의 이해 부족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시까지 개를 가축으로 보던 우리의 전통인식과, 반려동물로 전환된 서구의 관점이 충돌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오늘날 동물권에 대한 인식은, 반려동물을 넘어 가축과 야생동물로까지 확대되는 추세다. 이는 유럽의 채식주의 확대 및 모피 반대 운동이나, 2018년 스위스에서 바닷가재를 산채로 끓는 물에 넣어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등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유럽의 변화는 화천의 ‘산천어 축제’처럼, 재미로 잡아먹는 살육 축제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는 사뭇 다르다. 즉 동물권과 관련해서 우리의 인식은 아직도 과도기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물윤리와 수단화가 이율배반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박소연 대표 사건이다. 언론에 보도된 박소연 대표의 행동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같은 철저한 이중판단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생명윤리에 대한 깊은 인식과 통찰 없이 이루어진 동물보호자의 어두운 그림자이자 비극적인 결말이다.

불교는 세계의 그 어떤 종교보다 생명존중에 대한 인식이 강하다. 윤회론을 기반으로 하는 불교에서, 인간과 동물은 현재 드러나 있는 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동물로 떨어질 수도 있고, 동물이 인간으로 승격될 수 있는 것이다. 윤회론의 관점에서 모든 동물은, 아니 모든 생물은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인 1326년 인도 승려 지공은 원나라 태정제의 명에 의해 금강산에 향 공양을 올리는 특별사절로 고려를 방문한다. 당시 고려의 산신제와 성황제(城隍祭)는 동물을 죽여 제를 지내는 희생제로 진행되었다. 요즘 무속에서 통돼지를 올리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이때 계율에 투철했던 지공은 ‘하루는 참선을 설하고 하루는 계율을 설하면서(一日說禪 一日說戒)’ 고려의 풍속을 바꿔 간다. 그러자 육제(肉祭) 중심의 산신제와 성황제가 과일과 채소만을 사용하는 소제(素祭)로 바뀌게 된다. 즉 내용을 바로 알면 반드시 올바른 실천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만일 박소연 대표가 불교의 깊은 생명존중의 관점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최소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물의 생명을 수단화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에서 모든 생명이란, 재화의 가치를 넘어선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수단화에 대한 우려

무분별한 안락사를 자행했다는 폭로가 나온 동물권단체 케어의 직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소연 케어 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연합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것에, TV프로에서 동물이 말하는 것을 꼽는 경우가 있다. 이는 ‘동물농장’ 같은 프로에서, 절묘한 더빙을 통해 동물이 의사 표현을 하는 것처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익숙한 이런 방식이 왜 저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일까? 여기에는 바로 ‘동물에게 영혼이 있는가?’라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히 동물도 영혼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동아시아가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 문화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임을 아는 분은 많지 않다. 사실 영혼의 범주를 규정하는 것은 문화권에 따른 식생활방식과 직결되곤 한다. 과거 동아시아나 인도처럼 채식중심인 경우는 동물의 영혼을 인정한다. 채식중심이기 때문에 동물에 영혼이 있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윤회론이 작동하면, 동물과 인간의 편차란 눈에 보이는 현상의 차이일 뿐, 본질의 차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육류가 주식인 유목문화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동물섭취가 불가결한 상황에서 동물의 영혼을 인정하면,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유목문화에서는 동물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며, 기독교나 이슬람 전통에는 동물에게 영혼이 없다. 여기에 <구약>에서 신이 동물을 포함하는 자연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관점이 결합되면, 동물의 수단화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오늘날 서구에서 가축을 철저하게 수단으로서만 키우는 방식은 이와 같은 사고에 기초한다. 닭은 A4용지 한장 크기도 안 되는 비좁은 공간 속에서, 평생 한 번 돌아서 보지도 못한 채 알만 낳다가 죽는다. 또 젖소는 인공적으로 끊임없이 임신을 반복하며 우유를 생산하게 된다. 이 같은 서구의 동물에 대한 수단화가 빚은 현대적인 재앙이 광우병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서구의 방식은 2008년 개봉한 영화 <워낭소리>에서, 우리가 소를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 역시 가축을 농경 등에 이용하며 수단화하고, 때로는 도축을 통해 식용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스며있다. 즉 영혼의 유무에 대한 판단이, 동물의 수단화 과정에서 각기 다르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화 배경의 차이 때문에 서양인들은 동물이 말하는 프로를 신기하게 보는 것이다.

사실 동물이 말하는 구조는 인도문화와 관련된다. 실제로 동물이 인간처럼 말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인 <이솝우화>는, 인도불교 속의 부처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동물은 윤회를 통해 사람이 될 수 있고, 사람 역시 동물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인간과 동물의 의사소통 역시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인도문화 속에서 강한 동물에 대한 존중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때문에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은, 뛰어난 능력을 갖춘 동물과 계약관계를 통해 이들을 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의 관계가 주종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라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 인도 신화가 반려동물의 가장 오래된 모습이라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이 같은 인도문화는 불교에도 영향을 미쳐, 문수보살은 푸른 사자를 타며,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인식이 불교를 타고 동아시아로 유입되는 것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변화는 우리에 앞서 서구에서 먼저 시작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동물윤리에 따른 필연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나는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 동물권단체인 ‘케어’에서 발생한 집단 안락사 문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반려동물의 문제는 이제 물질적인 환경의 가치를 넘어서, 동물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문제를 환기해 내야만 한다. 즉 기독교 배경의 동물 인식이 아닌 불교적인 동물윤리가 작동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돼야만 자본에 생명이 휘둘리는 사건이 반복되지 않는다. 불교는 행복을 말하는 종교다. 그리고 그 행복은 인간과 동물, 그리고 모든 생명에게 미치는 가장 위대한 자비임을 우리는 동물권과 관련해서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3458호/2019년1월23일자]

자현스님  중앙승가대교수·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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