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범종, 세계 속 ‘코리아 벨’로 울려 퍼지길”

 

 

근대기 일본종 모방 등장
전통형도 1945년까지 제작
 
70년대 ‘대형 범종불사’ 시작
종신 시주자 명단 가치 반감

상원사·성덕대왕종 일색
신 양식으로의 모색 필요

근대기가 시작되는 19세기 후반 마지막으로 주종 활동을 한 인물은 이덕환(李德還)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신륵사명 남장사종(神勒寺銘 南長寺鐘, 1839)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범종(1890) 제작을 끝으로 약 40여 년간 전통형 범종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근대기 이전부터 시행된 사찰에 대한 과도한 과세와 승역(僧役), 일본 불교의 침투 속에서 더욱 피폐해져 간 한국 불교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폐사된 절에 남아있던 범종을 가져오거나 돈을 주고 사오는 일들이 빈번해 졌고 결국 이는 범종 주조의 쇠락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활약한 장인이 종 수리를 전문으로 담당하였던 임화순(林化順)과 김치운(金致云) 이다. 

임화순은 범종을 새롭게 제작하기보다 장기간 사용으로 인하여 파손ㆍ망실된 부분의 수리를 담당하였던 수리 장인이었다. 임화순의 중수 작업은 범종의 무게를 지탱하는 용뉴와 타종을 위하여 쳤던 종신 부분에서 주로 발견되며, 이는 과도한 접합선이나 재질의 차이를 통해 시각적으로 쉽게 확인된다. 임화순은 자신이 중수했던 범종에 추각(追刻)으로 수리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1916년 충청북도 보은 법주사를 시작으로 1931년 구미 수다사종까지 약 15년 동안 9점의 범종을 중수한 것이 확인된다. 20세기에 중수만을 담당하였던 임화순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게 된 이유는 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범종을 새롭게 제작하는 것보다 저렴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김치운은 쌍계사명(雙溪寺銘) 범종(1916)의 용뉴를 수리한 이후부터 새로운 전통형을 계승한 범종을 제작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20세기 전~중반에 경상도를 시작으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에서 활동했던 주종장으로서 파손, 망실된 부분을 수리하는 장인으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자신의 범종을 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김치운이 만든 범종은 1916년 쌍계사명 범종(김천 직지사 소장)의 중수 작업을 시작으로, 1939년 상주사명(上住寺銘) 범종(군산 상주사 소장)까지 약 23년 동안 11점의 범종과 2건의 주종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이는 조선후기 제작된 전체 범종에서 약 10%를 차지하는 수량으로 20세기 들어와 수장(首匠)으로 활동한 주종장은 김치운이 유일하다. 그가 제작한 범종은 쌍용의 용뉴를 갖추고, 낮지만 좁은 천판과 종구가 좁아진 종형을 일정하게 표현하였다. 

또한 종신을 횡선으로 구획하는데, 구획된 상단에만 원권의 범자가 주회되고, 연곽과 보살입상은 중단에 구분하여 부조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도안의 구성은 일본종이 유행하던 20세기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양식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밝혀주는 점에서 의미 깊다. 그러나 범종에 부조된 도안에서 도장을 찍은 듯한 도식화가 진행된 점은 19세기 범종과 확연한 기술적 차이를 보인다. 그는 1934년 경기도 화장사에서 범종을 제작할 때 해당 사찰을 직접 방문해 주조 작업을 하는데, 이는 앞 시기 주종장의 작업 형태와 동일한 것이다. 아울러 그가 활약한 시기의 많은 일본종과 달리 전통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후기 주종장 이덕환을 계승한 마지막 장인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근대기 범종은 그동안 전승되어 왔던 한국 전통형 범종과 중국종을 따른 외래형 범종 제작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면서 일본종을 모방한 새로운 혼합형 범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시기 혼합형 범종은 외형적으로 일본종을 따르고 있지만 4개의 연곽 안에 배치된 9개의 연뢰, 종신에 배치된 보살입상, 당좌 등이 일본 범종에서 보이지 않는 한국종의 표현을 따른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는 바로 한국 장인들이 일본 범종을 제작하면서도 한국적 요소를 가미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이러한 혼합형 종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전통형 범종도 일제 강점기부터 다시 시작되어 후반인 1831년부터 1945년까지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편 해방 이후 6.25 전쟁과 혼란의 격동기를 지난 현대에 들어와 경제적 안정과 종단의 발전을 계기로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는 대형 범종을 만드는 불사를 시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부터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범종을 제작한 주종장은 성종사(聖鐘社) 대표를 맡고 있는 원광식(元光植)이다. 그는 1958년 원국진의 조수로 들어가 범종을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3년부터 높이 4.5m, 무게 3.9ton에 달하는 대종을 제작하면서 기량을 인정받는다. 

이후 원광식은 ‘한국 범종연구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전통 범종의 복원과 밀납 주조 공법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를 인정받아 2001년 범종 장인으로는 최초로 국가무형문화재 제 112호 주철장 보유자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대형 범종과 전통 범종의 복원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으며 2년여의 고증을 거쳐 2016년에 완성된 ‘신라대종’은 성덕대왕 신종을 외형적으로나 소리 면에서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 낸 결과물로 인정받고 있다. 

이상과 같이 근대기 이후 주종활동은 1970년대 이후 범종 제작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활발해졌다. 따라서 현대의 주종장들은 전통기술의 단절 속에서도 많은 범종을 제작하게 되면서 현대 과학과 기술적 공법을 접목시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범종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우선 종신 전체에 번잡스러우리만치 빽빽이 새겨 놓은 시주자 명단이다. 종의 크고 작음을 떠나 시주한 돈만큼이나 큰 글씨로 새겨진 시주자 명단은 종의 미관과 본래의 가치를 반감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과거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통일신라 범종의 명문조차 천판(天板)의 윗부분이나 종신 내부, 아니면 최소한 종신의 문양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구석진 곳에 조심스레 새긴 것은 종을 만드는 궁극적인 목적이 지옥에 고통 받는 중생의 제도라는 본래의 의미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범종의 시주자 명단은 과거의 경우처럼 안 보이는 내부에나 별도의 현판으로 제작하여 종각에 달아두는 작은 배려가 아쉽기만 하다. 

또한 지금 전국에 만들어지는 우리나라 범종의 대부분이 상원사종, 또는 성덕대왕 신종 일색인 점은 우리가 반성하여야 할 커다란 문제점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의 재현이 단순히 모방만을 위주로 되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 범종 장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전통 양식의 절충과 신(新) 양식으로의 모색이란 실험 정신은 현재의 우리 범종을 제작하는 데 있어 좋은 시금석이 되리라 믿어진다. 

그런 점에서 21세기의 범종이 과연 후대에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 질 것인가에 대한 과감한 성찰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나아가 탁월한 범종의 제작에는 주조 기술 못지않게 필연적으로 과거의 수준 높은 범종의 조사와 재현이 반드시 필요하다. 국내 뿐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 있는 통일신라, 고려 범종의 중요 자료들에 관한 형태 및 문양 등의 자료를 충실히 수집, 보완하여 전통 범종의 재현에 반드시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료를 통해 전통 범종을 충실히 재현하되 그 형태와 문양을 고스란히 베끼기보다 새롭게 개발하는 것도 앞으로 수행하여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이를 통해 지금 만들어진 21세기의 범종은 어떠한 모습으로 후대에 평가될지 깊이 고민하여 현대의 범종은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모색되는 것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요구된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나라 범종에 관해서는 형태와 문양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사적인 연구가 중심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근래 음향과 금속의 성분 분석, 여기에 주조 기술을 포함한 과학적 연구 성과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이처럼 현대의 첨단 기술을 동원해서라도 우리가 그동안 풀지 못했던 통일신라 종의 실증적인 조성 과정과 종소리의 구체적인 생성 원리 등이 차근차근히 밝혀질 때 우리의 종은 한국 종으로서 뿐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KOREAN BELL’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불교신문3462호/2019년2월6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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