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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46> 벽송 지엄선사

기사승인 2019.02.15  15: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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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좌와…‘내 마음이 무엇인고?’ 궁구하게나”

 

대혜어록 ‘구자무불성’ 참구해 
의심 타파…원묘의 ‘선요’ 보고 
‘알음알이’까지 내려놓은 지엄 
대혜와 원묘 기반 선풍 전개

납자들의 요람 벽송사 창건
태고보우-환암혼수-구곡각운
벽계정심 ‘법통’ 부용영관 
서산휴정 부휴선수에 전해

“도서ㆍ절요 통해 佛法 밝히고
대혜어록ㆍ선요 공부함으로써 
‘지해의 병통’ 제거해야 한다”

보조 본받아 선교 고루 배등
사집 출발, 17〜18세기 이르러 
사미과 사교과 대교과 완성 
승가대학 교과목 제정 ‘효시’

벽송 지엄 선사가 하루 한 끼 공양을 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와 교류를 두절한 채 정진했던 함양 벽송사 전경. 왼쪽은 ‘지리산 벽송사’ 현판.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는 문화적으로나 불교적으로 최고로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런데 안사의 난(755˜763년)을 계기로 당나라의 태평성대가 흔들렸고,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상 문화 종교까지도 변화됐다. 불교계도 당연히 큰 변화가 있었다. 안사의 난 이후, 경전을 토대로 발전한 8종 가운데 교종은 쇠퇴 혹은 명맥만 겨우 유지되었고, 정토종과 선종만이 번성했다. 즉 언제 어디서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선(禪)과 염불이라는 점이다. 또 무종 때 회창파불(845˜847년)이 일어나 교종은 타격을 입었어도 선종은 크게 발전했다. 이때 암두 전활(828˜887년)은 속복을 입고 동정호 기슭에서 뱃사공 노릇을 했다.

조선시대 벽계 정심은 신분을 감추고 속복을 입고 황악산 고자골 물한리에 들어가 호수 곁에 움막을 짓고 재가자처럼 살았다. 선사는 아침에 호숫가에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참선하고, 땔나무를 해서 김천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벽계 정심과 같은 선사들이 법난에도 굴하지 않고, 일상에서 선(禪)을 전개했기 때문에 조선 500년간 통한(痛恨)의 불교사에도 한국불교 조계종은 살아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 열악한 상황에도 활동했던 선사들이 있어 선의 명맥이 이어졌다. 정지국사 지천(智泉, 1324˜1395년)은 <능엄경>을 간경하다가 도를 깨우쳤고, 무학대사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지공에게 인가를 받았으며, 나옹 혜근에게 법기(法器)로서 인정받았다. 지천은 무학대사와 용문사에 대장경을 봉안했으며, 홀로 은둔하며 수행했다. 지천의 탑과 비가 양평 용문사에 모셔져 있다. 또한 고봉 법장(1351˜1428년)은 수선사 16세로서 나옹 혜근의 문도이다. 법장은 머리를 기르고, 풀피리를 불며, 표주박을 들고 다니는 등 기이한 모습으로 걸림 없이 살았다고 한다. 함허 득통이 <현정론> 저술을 통해 불교 배척의 부당함을 토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선 초기는 무학대사의 노력으로 불교탄압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지만, 무학대사가 입적한 후에는 불교 배척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벽계정심과 벽송지엄의 법맥

연산군, 중종 대에 이르러 불교 핍박으로 인해 선맥이 실날처럼 위급한 즈음, 법맥을 계승한 선사들이 있다. 정심과 지엄이다. 벽계 정심(碧溪正心)에 대한 행적은 <불조원류(佛祖源流)> <동사열전>에 단편적인 기록만 있을 뿐 자세히는 전하지 않는다. 정심은 금산(金山) 출신으로 성은 최씨(崔氏), 호는 벽계(碧溪), 별호는 등계(登階)이다. 선사는 구곡 각운(龜谷覺雲)의 법을 받았으며, 환암 혼수의 손제자에 해당한다(태고보우-환암혼수-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 <불조원류>에 의하면, 정심의 선은 벽송에게 전해졌고, 교는 정연 법준(淨蓮法俊)에게 전수됐다.
 정심은 명나라에 가서 임제종 총통화상(摠統和尙)의 법을 받고 귀국했다. 선사는 공안을 참구하고, 임제의 할을 썼으며, 조주의 선풍을 고수했다. 연산군의 척불이 심한데다 승려를 강제로 환속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정심은 황악산에서 재가자처럼 살았다. 이 무렵 제자가 찾아왔는데, 벽송 지엄이다.

벽송 지엄(碧松智儼, 1464~1534년)의 법명은 지엄, 법호는 야로(野老), 당호는 벽송이다. 속성은 송(宋) 씨, 부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복생, 어머니는 왕씨이다. 지엄의 모친 꿈에 한 인도 스님이 예를 올리고 자고 간 뒤에 아기를 잉태해 태어난 아기가 지엄이다. 아이는 특이한 골격과 기상이 웅혼하였고, 어려서부터 글공부와 칼 쓰기를 좋아하며 병서(兵書)에 능했다. 지엄은 1491년 여진족이 쳐들어왔을 때, 큰 공을 세웠으나 사람을 죽이는 일에 허무함을 느끼고 출가할 결심을 한다. 그는 ‘대장부로 태어나 심지(心地)를 지키지 않고, 헛된 명예를 ◎⃝아 외부로 치달아서야 되겠는가!’라고 결심한 뒤, 28세에 계룡산 상초암 조징(祖澄)을 찾아가 출가했다. 

지엄과 똑같은 결심을 하고 출가한 선사가 있는데, 우두종의 윤주 지암(577˜654년)이다. 지암은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영광과 명예를 얻는 군인이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궁구한 뒤에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40세에 출가했다. 아쇼카 대왕도 정복군주로서 칼링가에서 수많은 이들을 죽인 뒤, 무상함을 느끼고 불교로 귀의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지엄은 교학에 밝은 연희(衍熙)를 찾아가 <능엄경> 등 경전을 공부했다. 지엄은 선지식을 찾다가 벽계 정심이 황악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정심은 유생들의 눈을 피해 산에서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팔며 겨우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지엄은 스승과 함께 생활하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선사는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겨우 짬을 내어 스승에게 도를 물으면, 대답이 한결 같았다. “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닐세. 행주좌와에 ‘내 마음이 무엇인고?’라고 궁구하게나.”

 “밖에서 찾지 말고 정진에만 힘쓰라”

벽송사 지객실에 있는 지엄 선사 진영.

수개월간 지엄은 땔나무를 지고 김천시장에 내다팔면서 ‘내 마음이 무엇인고?’ 골똘히 참구하며 지냈다. 조급증이 났던 지엄은 스승에게 선지(禪旨)를 물으면, 스승은 똑같은 답변만 늘어놓았다. “허, 그걸 알면 그것도 알아지는 걸세.” 지엄이 재차 물으면, ‘답을 해줄 수 없지’라고 퉁명하게 말했다.

마침내 지엄은 스승의 무성의에 폭발할 지경이었다. 지엄은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보따리를 싸서 산을 내려가는데, 스승이 쫓아오면서 계속 이름을 불렀다. 지엄은 들은 채도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때 스승이 ‘나를 보고 가게나!’라고 소리치자, 지엄이 고개를 돌렸다. 이때 스승이 말했다. “옜다, 내 법을 받아라!”

지엄은 스승의 말을 들으며 주먹을 보는 순간, 활연 대오했다. 이후 지엄은 스승을 하직하고,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으로 들어갔다. 지엄은 <대혜어록>을 보면서 ‘구자무불성’을 참구해 의심을 타파하였고, 고봉 원묘의 <선요>를 보고 알음알이(解)를 내려놓았다. 지엄은 평생 대혜와 원묘의 선사상을 기반으로 선풍을 전개했다. 이 점은 서산 휴정이 지엄의 문집을 간행하고 행장을 찬술했는데, 여기에 밝힌 바이다.

지엄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지 않고 하루 한 끼 공양을 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와 교류를 두절한 채 오롯이 정진했다. 1520년 56세에 지엄은 함양 지리산에 벽송사를 창건했다. 이 벽송사는 16세기 창건 이래 근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사들을 배출한 수행납자들의 요람터이다. 필자가 그곳을 찾아갔을 때는 녹음이 우거진 여름이었다. 높은 고도로 오르는 길녘, 몇 번이고 감탄하면서 선방에 이르렀다. 고즈넉한 선방의 분위기, 앉아만 있어도 번뇌가 사라질 도량이었다. 이번 생은 어렵고, 다음 생엔 이곳에 와서 정진하리라!

1534년 겨울, 지엄은 지리산 수국암으로 옮겨가 <법화경>을 강설하다가 ‘방편품’에 이르러 “이 노승은 여러분을 위해 적멸상(寂滅相)을 보이고 가리니, 여러분은 밖에서 찾지 말고 더욱 정진에만 힘쓰라”고 당부한 뒤에 열반에 들었다. 선사는 법납 42세, 세납 70세에 입적했다. 입적한 뒤에도 얼굴빛이 변함이 없고, 팔다리는 마치 산사람처럼 부드러웠다고 한다. 통도사에 <벽송집> 판목이 있는데 행장은 휴정이 저술했다. 지엄의 저서로는 <벽송당야로송> <훈몽요초> <염송설화절록> 등이 있다. 

 지엄의 한국불교사적 의의

첫째, 지엄의 체계적인 선사상은 승가대학 교과목 제정의 효시가 됐다. 곧 지엄은 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와 지눌의 <절요>를 통해 불법을 밝힌 다음 <대혜어록>과 고봉 원묘의 <선요>를 공부함으로써 지해의 병통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즉 지엄은 고려 보조지눌의 사상을 본받아 선교를 골고루 배등했다. 이 점은 강원의 교과목이 사집과로 출발해 17〜18세기에 이르러 사미과(서장, 도서, 절요, 선요), 사교과(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대교과(화엄경)으로 완성됐다.

둘째는 (앞의 첫째에 이어서) 선교겸수의 체계를 세우고, 간화선풍을 선양했다. 곧 몽산 덕이의 선풍과 고봉 원묘의 선풍이었다. 이 점은 윗대 조사인 지눌의 선교일치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지엄의 사상은 후대 제자인 휴정에게서 완벽하게 정립된다.

셋째는 삼문(敎禪淨)의 불교 수행방법을 지향한 면이 드러나 있다. 지엄은 ‘조사선을 참구하고, 여러 교학을 공부하며, 여기에 정토왕생을 희구한다’고 했다. 이 점은 후대 서산이 확고하게 체계화했다. 지엄은 법통면에서 임제 태고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그 문하에 부용 영관을 배출했다. 다시 영관 문하에서 휴정과 부휴선수가 배출됐다. 사상적으로도 지엄은 고려 지눌의 사상을 계승해 발전시켰고, 지엄에게서 정립된 사상은 후대 휴정에 의해 완성됐다. 한국불교사적인 위치에서 선사를 볼 때, 고려와 조선후기, 현 근자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 

[불교신문3463호/2019년2월16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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