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施恩으로 사는 출가자 밥값 하는지 돌아봐야”

해제 막바지, 치열하게 정진하는 백흥암 선원 스님들

무술년 동안거 해제법회가 2월19일 8개 총림과 전국 선원에서 봉행됐다. 지난 동안거 동안 비구 비구니 선원 100곳에서 스님 2033명은 참나를 찾아 정진했다. 해제일을 하루 앞둔 2월18일 영천 은해사 산내암자 백흥암 선원을 찾았다. 지난 겨울 백흥암 선원에서는 13명 수좌 스님과 10여 명의 외호대중이 안거를 지냈다. 법납 53년 선원장 영운스님을 위시해 막 출가한 사미니 스님까지 심검당에서 일념으로 화두를 들었다.

비구니 스님 수행도량인 백흥암은 1년 중 부처님오신날과 백중 법회 때만 갈 수 있는 사찰이다. 2012년 개봉해 화제가 됐던 영화 ‘길 위에서’를 통해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13년(873) 혜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창건 당시 사찰 이름은 백지사(栢旨寺)였으며 조선 명종1년(1546) 때 중창된 후 백흥암이라고 불렸다. 보물 790호 극락전도 그 무렵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백미로 꼽히는 보물 486호 수미단이 있다.

백흥암이 오늘날처럼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30여 년 전 회주 육문스님과 선원장 영운스님이 주석하면서부터다. “객과 주인이 같은 회상을 꾸리자”고 마음을 낸 두 스님은 마땅한 도량을 찾다 백흥암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곳에는 내원사 스님이 혼자 주석하고 있었는데, 정진처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선뜻 수락했다고 한다. 겨우내 메주를 쑤고 장작을 쌓아두고 대중 맞을 준비를 해준 덕분에 이듬해 봄부터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을 시작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사중에서 스님들은 화두를 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달이 뜬 저녁까지 큰 방에 켜진 두 개의 촛불로 무명을 물리쳤다. 당시 백흥암에서 부전 소임을 맡았다는 선원장 스님은 “팔모등 하나 켜고 정진하고 있으면 온천지가 고요했다. 기와집 위를 비추는 달빛, 바람, 낙엽 소리까지 정말 잘 들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요함(靜)으로 들어가는 오후 시간 정진하는 그 느낌이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다.

수행과 해제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선원장 영운스님,

이제는 전기도 들어오고, 중창도 됐다. 달라졌으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여전히 고찰은 고즈넉하고 고요하다. 흔한 풍경조차 매달려 있지 않아 이곳에선 바람도 조용히 지나간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일반인들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까닭에 한낮에도 소란스러움을 찾기 어렵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심검당이 주불전과 붙어있어 수행에 방해될 수 있다는 우려로 회주 스님이 일찌감치 산문 출입을 제한한 덕분이다.

인적도 드믄 고요한 산사에서 스님들은 매일 12시간씩 정진했다. 오전3시30분 입선에 들어 5시까지 정진하고 오전6시 발우공양을 한다. 다시 7시30분에 오전 입선에 든다. 방선 후 점심공양을 한 뒤 오후1시부터 정진이 이어진다. 일과는 밤 10시가 되면 마무리된다. 대중이 함께 청규를 정해 생활하기 때문에 오차는 허용되지 않는다.

수좌 스님들 뿐만 아니라 백흥암 신도들도 정진력이 남다르다. 선원장 스님은 벌써 11년째 금요법회를 열어 재가자들에게 간화선을 지도하고 있다. 20여 명의 재가자들이 함께 정진하는데 1시간 동안 스님 법문을 듣고, 2시간 동안 화두를 참구한다. 개근한 불자에게 선원장 스님이 죽비를 선물했는데 열기가 뜨거워져 23명이 이미 죽비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들 못지않게 재가자들 근기가 수승하다.

재가불자를 비롯해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미니 스님부터 40~50년을 넘게 수행한 구참 스님들을 지도해온 선원장 스님은 이제 앉은 모습만 봐도 수행이 잘 되나 안되나 알 수 있다고 한다. 스님은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보기 좋다. 가끔 ‘머트럽다’고 하는 스님도 어느 철엔 잘 살다 가고 또 더 나아져 돌아오기 때문에 미리 단정 짓기보다 두루 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만 스님은 수행자로서 날마다 받는 발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스님께서 지금 받은 발우가 피 한 발우와 같다. 쌀 한 톨, 간장 한 방울까지 허투루 하지 말라고 하신 가르침을 실천했고 또 후배 스님들에게 전하고 있다”며 “스님들은 시은(施恩)으로 사는데 밥값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일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스님은 “내가 벌어서 먹고산다고 생각하겠지만 공기가 없다면 물이 없다면 농부가 없다면 과연 여러분이 살 수 있겠냐”며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항상 고마움과 아끼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겨울 굳게 닫혀있던 산문을 열고 나오는 스님들에게도 영운스님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들인 2000여 명의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새벽마다 예불을 올리며 일체중생의 행복을 발원한 것을 생각하면 환희롭다”며 “옛날 어른 스님들은 만행 때도 동정일여 하라고 말씀하셨다. 결제 때 각자 발원한 곳에서 열심히 수행하고 기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심검당에서 정진 중인 스님들 모습.
이번 동안거 동안 심검당에서는 13명 스님이 가부좌를 틀었다.
해제를 맞아 사찰을 나서는 스님들
도감 소현스님(사진 오른쪽)에게 인사하는 수좌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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