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종단지도자 포럼을 회향하며

 

지난 14일 종단의 주요 소임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종단지도자 포럼이 개최되었다. 필자도 승려복지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를 주제로 발표를 하였다. 종단의 중진스님들이 많이 참석하여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대 흐름과 종단의 주요 현안에 대해 집중적인 고민의 시간을 가진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조금 미진한 부분이 느껴졌다.

붓다 당시는 물론이었고 그 후로도 상당기간 인도와 중국, 한국, 일본에 전파된 불교의 사상체계는 당시대 최고 수준의 지식이자 인문학적인 교양의 척도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현재 전해지는 불교경전의 지적수준과 성취는 인류(유발 하라리 식의 표현으로는 호모사피엔스)가 도달한 최고의 지적 결정체로 손색이 없으며, 여전히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 자료로서 인문학적 사상의 보고(寶庫)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과학적 진보가 가져온 성과는 이러한 사상체계에 다양한 도전장과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제는 종교(불교)가 과학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해내지 못하고 어중간한 추상성에 머물러 있어서는 동시대 사회나 인류에게 무엇 하나 해결 해 줄 수 없는 역사적 잔재(殘在)로만 기억될 위기가 점차 현실화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자 많은 스님들의 공통된 위기의식일 것이다.

종단지도자 포럼에서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이 발제한 다양한 내용은 현대 지식사회의 한 획을 이룬 유발 하라리의 ‘호모사피엔스’, ‘호모데우스’에 이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는 3부작에 대한 발제자 나름의 해석이고 대응이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주류 지식사회의 고민을 보여주는 지표로 판단된다. 유발 하라리가 제기한 21가지 제언에 보이는 다양한 주제들 일, 자유, 평등, 전쟁, 정의, 탈진실, 명상 등 다양한 문제는 인류 전체에게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주제에 대해 우리 불교도 이제는 답해야 할 차례가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가 행사를 회향하면서 가진 생각이었다. 종교와 신, 명상 등 종교나 불교와 관련된 직접적인 주제도 물론이지만 전 인류가 정치와 도덕에만 의지할 수 없는 난제(難題)에 대해서도 이제는 불교적인 해법, 붓다의 21세기 법음(法音)을 들려주어야 할 책임이 교계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든 것이다. 물론 어느 하나 만만한 주제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세상은 무상한 것이니 선승의 화두 하나 던져주면서 슬그머니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이다. 동시대인의 언어와 대화법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풀어나가는 것 또한 새로운 시대 포교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전략이자 화법(話法)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종교가 가진 시대의 선지자적 역할이 많이 축소되었다고 하지만 뒤집어보면 인간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기술의 발전을 인류가 어떤 입장으로 수용하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교적 해석의 필요성은 더욱 증가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추세이다. 달라이 라마나 티벳의 스님들이 서구의 다양한 분야 과학자들과 현대사회의 제문제에 대해 끝없이 토론하는 장면을 자주 보곤 한다. 어찌 보면 간화선 수행중심의 한국불교의 입장에서는 조금 낯설기도 한 모습이지만 동시대의 문제에 대해 끝없이 해답을 찾아가고자 하는 티벳불교의 적극적인 모습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자세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현재 우리 종단의 많은 스님들이 수행과 학문연찬, 포교에 전념하고 있다. 사회적 제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답하는 스님들의 활구참법을 기대하며 동안거 해제에 즈음한 선방수좌들의 힘찬 할과 방이 들려왔으면 한다. 정말로 이제는 “유발 하라리에게 불교가 답해야 한다.”

사족이지만 세상사에서 많이들 부딪치면서도 늘 정답 찾기가 어려운 고민 하나 던져본다.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고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착한 일을 행한다면 그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악한 사람이라 해야 하는가” 교계의 많은 스님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면 행위를 하는 의도가 중요하므로 그 행동은 선행(善行)으로 포장되었더라도 나쁜 일이라고 보통 말한다. 하지만 나쁜 의도였지만 선한 행동으로 많은 대중이 생존의 혜택을 본다면 그것을 악행이라고만 할 수 있느냐는 일반대중들의 문제제기에 원론적인 답변만을 반복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하는 고민을 오래전부터 해 왔다. 역으로 좋은 의도를 가지면 그 행위의 결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모든 것은 좋은 일이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는가 하는 반론에 무슨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딜레마도 여전할 수밖에 없다. 새봄이 오는 이곳 지리산까지 많이 토론하고 정진하며 수행하는 좋은 인연들의 아름다운 법음(法音)이 들려오기를 기대해 본다.

덕문스님 19교구본사 화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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