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주최하고 불교평론이 주관해 '불교, 조선독립의 횃불을 들다'를 주제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세미나.

“전국 사찰의 지방학림, 3.1운동 본거지였다”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지 100주년. 독립선언과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불교계가 100년전 불교계 항일운동을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원행스님, 조계종 총무원장)와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소장 원철스님)는 지난 2월28일과 27일 각각 ‘불교, 조선독립의 횃불을 들다’와 ‘불교계 3.1운동과 항일운동’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불교평론>이 주관한 종단협 세미나는 3.1운동의 전개와 양상, 3.1운동 이후 불교계의 사회참여 활동을 짚었고, 불교사회연구소는 각 사찰의 지방학림을 중심으로 활발히 3.1운동과 항일운동에 참여한 불교계의 모습을 살폈다.

종단협 세미나의 주제발표로 나선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한성임시정부 출범이 결정된 1919년 3월과 4월 인천 만국공원과 서울에서 열린 국민대표자회의에 박한영(석전)스님과 이종욱스님이 불교계 대표로 참가한 점, 그해 4월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을 거점으로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 본부의 역할을 한 민단본부 출범 등 2개월여 진행된 3.1운동을 전반적으로 소개했다. 신상완, 이종욱, 송세호, 김법린, 백성욱, 박민오스님의 상해임시정부 가담, 해인사와 범어사, 대흥사, 직지사 출신 학인스님 10여명의 만주 독립군관학교 입교, 독립운동단체 가입 등도 언급했다.

이 밖에도 두 세미나를 통해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사상과 활동, 3.1운동 이후 불교의 사회참여활동, 제주 법정사 무장항일투쟁, 해인사의 3.1운동, 불교계의 3.1운동에 나타난 세계평화주의 등이 재조명됐다.

1. ‘김룡사(金龍寺)의 3·1운동’

김룡사의 3.1운동은 1919년 4월13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의 김룡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일으킨 만세운동이다. 김룡사의 공비생으로 중앙학림에 유학 중이던 전장헌이 독립선언서를 몰래 학생들에게 전해주면서 시작됐다. 민족독립의 열망이 가득했던 김룡사 지방학림 재학 스님들과 학생들은 이를 계기로 1919년 4월13일 장터까지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김룡사의 만세시위는 당시 김룡사 주지였던 혜옹스님의 만류로 중단됐다.

실행단계에서 멈춘 탓에 김룡사 사건의 전개과정과 전하는 기록 등이 거의 없다.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한 민동선이 1969년에 직접 쓴 회고록과 민동선과 김철의 회고 편지를 재구성해 출판된 1991년 <김룡사 지방학림 만세사건>이라는 잡지 글이 전부이다.

비록 기록은 부족하지만, 김룡사의 3.1운동은 불교계의 적극적 참여를 실증하는 중요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지방학림은 불교의 근대화는 물론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함양 등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물론 당시 일반사립학교가 구국의 일환으로 설립돼 항일의식이 강했던 데 비해 불교계 지방 학림은 항일의식이 미약하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를 보면 한용운과 백용성 선생이 민족대표로 가담한 것을 보았을 때 우리들도 그대로 방관할 수 없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수업시간이 끝나면 산골로 물가로 돌아다니면서 시국을 논하고 우리들의 행동계획을 약속하곤 했다”는 민동선 회고록을 통해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닌 지방학림의 청년승가와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한용운과 유심사에 모여 만세운동을 기획했던 중앙학림 학생들 대부분이 각 사찰의 지방학림의 출신인 것을 미뤄봤을 때, 결국 지방학림은 불교계 3.1운동의 본거지였다”며 “만세운동 이후에도 김룡사는 독립군의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3.1운동 정신을 지속해나갔다”며 설명했다.

2. 통토사 전수학원의 민족교육과 폐교사건

1941년 9월4일, 통도사가 운영하고 있었던 중등학교인 ‘통도사 전수학원(통도중학교)’의 교사 김말복(법명 수성)과 조병구(법명 용명)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했다는 게 체포 이유였다. 통도사 스님이었던 두 명의 교사는 이 일로 2년간 감옥에 수감됐고, 3년 후인 1944년 통도사 전수학원은 폐교됐다. 지금껏 이 사건은 ‘통도중 불온교수 사건’이라 지칭됐다. 전수학원이 중등학교 수준이었고, 폐교됐지만 해방 직후 보광중학교로 복교됐기에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1941년 여름방학을 맞아 각자 고향으로 귀가 도중 한 학생이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리면서 시작됐다. 그 학인의 가방엔 항일적인 민족의식 내용이 기재된 노트가 있었다. 평소 이 학교가 민족적인 교육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일제 경찰은 개강하자마자 교사 2명을 체포해 구속시켰다. “통도사 전수학원은 강습회에서 조회 시 일본 천황에 대한 궁성요배를 하기 이전에 앞서 대웅전의 부처님에 대한 요배를 먼저 했고, 교내에 국기(일본) 게양탑을 설치하지 않는 등…” 당시 일제 경찰의 사건 개요서를 통해 민족 교육을 실시한 통도사 전수학원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통도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지역에서 두 차례 주민들과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일제하 통도사는 민족운동과 관련된 역사가 많은 사찰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2명의 교사(김말복·조병구)가 독립운동 포상을 받은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은 불교 독립운동사로 다뤄져야 한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단정할 순 없지만 역사적 맥락을 보면 통도사 전수학원은 통도사 지방학림을 계승했으며 내외과를 겸수하는 것을 정체성으로 갖고 있다”며 “지방학림을 계승한 통도사 전수학원은 민족교육을 강조했고 정신적인 독립운동을 꾸준히 펼쳤다”고 강조했다.

3.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 발표

“한토의 수천 승려는 이천만 동포와 세계에 대하여 절대로 한토에 재한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함을 자에 선언하노라.”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1월15일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의 첫 시작이다. 이 글은 임시정부가 간행한 <독립신문> 1920년 3월1일자에 ‘불교선언서’로 실렸다. 이 선언서가 처음 알려진 것은 선언서가 발표된지 51년이 지난 1970년의 일이다. 불교신문의 전신 <대한불교>와 <동아일보>가 이를 처음으로 보도했다.

선언서의 명칭에 있는 대한승려연합회는 아직까지 정확히 어떤 단체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상해 임시정부와 같이 대일 항쟁을 펼친 불교계 독립운동단체로 추정된다. 게다가 선언서의 대표자는 오만광(오성월, 범어사 주지), 이법인(이회광, 해인사 주지), 김취산(김구하, 통도사 주지), 지경산(김경산, 범어사)스님 등 12명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해인사, 범어사, 통도사 주지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당시 불교계의 항일정신과 3.1운동 이후에도 불교계의 저항운동이 지속됐음을 엿볼 수 있어 의미가 적지않다.

선언서는 대한불교 7000여 스님의 이름으로 불교가 독립항쟁에 나선다는 결연한 의지를 동포와 세계만방에 선포함과 동시에 불교의 근본 종지를 평등과 자비로 내세우면서 침략주의와 군국주의로 치달은 일본을 불교의 적으로 간주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역대 고조(高祖) 제덕(諸德)으로 유풍으로 도도히 내려온 한국불교 전통임을 밝히고, 한국불교가 조선조에 압박을 받았으나 세계 불교사상사에 우뚝 선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 위급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바 독립을 위한 투쟁은 불교도로서 당연함을 천명했다. 민족문화와 혼을 말살하는 일본의 압제를 지적하며 오직 나아가 싸우겠다는 혈전의 의지도 담았다.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선언서는 불교 정의론 제시, 의병정신 계승, 바르고 행복한 정치공동체 구현의 메시지가 담겼다고 해석한다”며 “오늘의 한국불교에도 매우 의미있는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독립을 위해 노력한 불교계 활동을 되짚는 자리가 다양하게 펼쳐졌다. 1919년 11월15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불교 7000명의 스님들을 대표해 12명의 스님 명의로 발표된 대한불교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도 이번에 재조명됐다. 사진은 대한불교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가 실린 1920년 3월1일 상해 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 하단에 '불교선언서'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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