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한반도 종착지이자 통일 한국 출발지”

후백제가 왕건에 항복하고
견훤이 생을 마감한 그 곳

왕건이 태평시대 염원하며
4년에 걸쳐 지은 고려 국찰 
산은 天護, 절은 開泰 命名 

왕건이 개태사를 창건하며 함께 모신 보물 제219호 삼존불상.

논산 개태사(開泰寺)는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재통일하고 태평시대를 여는 염원을 담아 창건한 고려 국찰(國刹)이다. 육해공군 삼군 사령부가 있는 계룡대와 논산훈련소가 인접해 있어 예나 지금이나 국방과 밀접한 사찰이다. 

계룡대 인근 국방과 밀접

지난 3월28일 개태사를 찾았다. 세종시를 지나 공주를 거쳐 대전으로 향하면 계룡산이 따라 나선다. 충남 연산면이다. 계룡역을 지나 왼쪽 길 옆에 개태사가 얼굴을 드러낸다. 종루 앞에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 알림판이 펼쳐져 있는데 ‘대한불교 조계종 호국종찰 개태사’ 사찰명이 눈길을 끈다. 나라를 수호하는 염원에서 창건하고 이후에도 이와 관련한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오니 ‘호국종찰’(護國宗刹) 수식어가 적격이다.  

개태사 앞을 지나는 도로는 호남과 중부를 잇는 교통 요충지이며 전략 거점이었다. 충남과 호남을 가르는 대둔산이 북쪽으로 와서 남으로 향하는 계룡산과 만나 계곡을 이루는 곳에 개태사가 들어섰다. 두 산이 나란히 달리며 만든 길은 진잠(鎭岑, 현 대전)과 후백제 도성 완주(完州, 현 전주)를 동남으로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러한 지형이 개태사에게 국찰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과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는 전투 당사자라는 고난을 함께 주었다. 

개태사 주변 연산 지역과 협곡은 고대 삼국통일의 운명을 건 마지막 일전이 두 번이나 벌어진 역사현장이다. 김유신과 계백이 일전을 겨룬 황산벌이 이 인근이며, 270년 뒤 후삼국의 쟁패를 놓고 왕건과 후백제가 다시 이 곳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데쟈뷰가 일어난 것도 전투 현장에 개태사를 창건한 것도 자연이 만든 운명이다. 어디 고대 뿐이랴. 삼군사령부 계룡대가 인근에 자리한 연유도 따지고 보면 계룡산 지형을 이용한 전략적 판단 아닌가.

개태사 전경.

호남 중부 잇는 유일한 통로

왕건이 견훤의 큰 아들 신검을 물리치고 삼한을 재통일한 후 4년에 걸쳐 개태사를 지었다. 왕건은 친히 법요식에 참석하고 발원문을 부처님 전에 올렸다.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 12월이었다. 발원문 안에 후백제와의 중요한 전투와 최후 승리까지의 기록을 담고 개태사를 창건하는 이유와 염원을 담았다.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맡은 관사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니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 한다”는 이 구절에 개태사 창건 이유와 염원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개태사는 삼한 분열의 종착지이자 통일 한반도의 출발지이다. 아들 신검 일파에 의해 금산사에 유패됐다 나주로 탈출해 고려군에 귀부한 견훤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후백제와의 전면전을 망설이는 왕건을 재촉한다. 그리하여 몇 차례 주요한 전투가 벌어진다. 결정적 전투는 지금 경북 선산 일대에서 벌어진 일리천(一利川) 전투였다.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후백제군은 70노구를 이끌고 왕건과 함께 나타난 견훤을 보고 흔들리는 바람에 패한다. 

신검이 전투에 참가한 사이 견훤과 손잡은 사위 박영규가 수도 완주를 점령하니 신검은 황산으로 물러나 왕건과 일전을 벌이지만 결국 무릎 꿇는다. 신검이 항복한 그 현장이 바로 개태사다. 그 근거가 왕건이 지은 발원문에 담겨 있으니 “황산에 말을 묶고 이 곳에 군사를 주둔하였다”는 구절이다. 

왕건은 왕위 찬탈이 본심이 아니고 동생들의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며 목숨을 구걸하는 신검을 살려준다. 견훤은 자신을 배반하고 결국 후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아들 신검을 살려준 분을 못이겨 등창을 앓다 죽는다. <고려사>는 그 장소가 ‘황산의 불사(佛舍)’ 였다고 전한다. 황산은 천호산의 백제시절 지명이다. 신검의 항복과 견훤의 죽음 모두 936년 9월의 일이다.  

왕건은 후백제의 창건주가 생을 마감하고 그 아들이 항복한 자리에 절을 지어 새 역사를 열고자 했다. 그래서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지었다. 

개태사는 원래 있던 절을 왕건이 새로 중창하면서 절과 산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견훤이 ‘황산의 불사’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고려사 구절과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관사(官司)에 명하여 불당(蓮宮)을 창조하였습니다. 이제 그 공역(工役)을 마치고 보찰(寶刹)을 일신(一新)하여 우러러 하늘의 도움을 잇고 엎드려 신령의 공덕에 힘입어 천하를 맑게 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라는 왕건 발원문이 그 근거다. ‘보찰을 일신’했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절을 새로 중창했다는 뜻이다. 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를 만든 조선의 김정호 역시 견훤이 죽은 사찰이 개태사였다고 단정했다. 

왕건 초상화를 모진 어진.

삼국 재통일 역사 현장

일부 학자는 견훤이 죽은 사찰을 그대로 둘 경우 후백제 잔존 세력의 정신적 중심지가 될 수 있는 우려 때문에 절을 새로 짓고 이름도 싹 바꾸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크고 우람한 삼존불상을 그 근거로 삼는다. 

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은 현재 극락대보전에 모셔져 있다. 개태사의 주법당이다. 본존상의 높이가 4.15m, 좌협시보살 3.53m, 우협시보살은 3.46m에 이르는 크고 장대하다. 하지만 표정은 친근한 상이다. 고려시대에는 마을 마다 미륵불을 모셨다. 가람은 사라졌지만 미륵석상은 지금도 논, 밭, 산 혹은 마을, 학교, 관청에 서있다. 고려시대 다른 미륵불처럼 개태사 삼존불상도 평범하고 친근한 얼굴이다. 삼존불은 개태사를 창건할 때 함께 조성했다. 1100년 개태사의 성쇠를 지켜본, 개태사의 역사다. 

개태사 창건 때부터 내려오는 소중한 보물이 또 있다. 대형 쇠솥 ‘개태사 철확(鐵)’이다. 삼존불과 더불어 창건 당시부터 내려오는 귀중한 유산이다. 개태사 철확은 원반 모양으로, 직경 289cm, 높이 96cm, 둘레 910cm로 아주 크다. 왕건이 스님 3000여 명이 밥을 지어 먹을 솥으로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수많은 전설과 신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개태사 철확.

1100년 내려오는 보물들

한 나라가 사라지고 생기는 현장에 세운 개태사는 그 뒤로도 줄곧 이 땅 역사와 운명을 같이했다. 가장 번성한 때는 고려였다. 왕건의 어진(御眞)을 모실 정도로 왕실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특별한 위상을 누렸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교학과 출판 불법 홍포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발원문 제목 ‘신성왕친제개태사화엄법회소(神聖王親製開泰寺華嚴法會疏)’에서 보듯 개태사는 화엄(華嚴) 성지였으며 이규보가 적은대로 “나라가 위태롭고 어지러울 때 개태사에 있는 태조의 진전(眞殿)에 와서 제사를 지내거나 병란이 평정되도록 기원하는” 국찰이었다. 도서관을 갖추고 인쇄 출판을 할 정도로 사세가 크고 교종의 본산 기능을 했다. 

이 곳에서 고려 최대 규모로 화려한 문양과 조형예술을 자랑하는 금동탑(국보 제213호)과 청동제 금고(金鼓)가 출토된 것으로도 개태사의 사세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개태사는 전략적 교통 요충지라는 이유로 창건되었지만 그 이유 때문에 큰 전쟁 때마다 참화를 겪었다. 특히 고려 후기 왜구의 노략질과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전투 현장이 되어 피해가 컸다. 전투 피해를 입으면서 서서히 사세가 기울고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도 수없이 많이 전해온다. 

개태사 부처님의 불력(佛力)에 기대어 난을 피하고 평화를 바라는 민중들의 희망이 서린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개태사에 몰려와 대웅전 문을 열었는데 삼존불의 눈에서 광채가 나 왜군이 눈을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왜장이 대세지보살의 목과 허리를 내리치고 관세음보살을 내리치려는 순간 빛이 나오고 칼이 부러져 적장도 쓰러져 죽었다. 

부여에 주둔하던 왜군이 대전으로 진출하기 위해 개태사 앞 협곡을 지나던 순간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개태사 스님들로 구성된 승병이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개태사 철확에 밥을 지어 먹은 군사들이 잘 싸워 왜군들이 물러갔다. 그래서 왜군은 쇠솥에 원한을 가져 옮겨 가려 했는데 그 때 마다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려 손을 대지 못했다 등의 이야기다.

솥은 실제로 영험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부산에서 배에 선적하려는데 솥 안에서 큰 소리가 나서 한바탕 소동 끝에 선적이 보류되었다.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 박람회에 출품했는데, 그 때부터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진정을 내 다시 돌아왔다. 개태사가 있는 연산지역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연산 지역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염라대왕이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미륵 강경 미내다리를 보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염라대왕도 알 정도로 유명하다는 것이다.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대탑을 돌려줄 것을 촉구하는 알림판.

수많은 영험담 전해져 

수많은 영험담이 내려오는 사찰답게 재등장도 흥미롭고 극적이다. 왜구에 의해 절이 불타고 강바닥에 엎어져 있던 삼존불상은 일제시대 김광영 보살의 꿈에 나타나 개태사가 다시 이 땅에 우뚝 서는 계기를 맞는다. 김보살은 1938년 삼존불상을 모시고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불교 설법의 요체를 16글자로 요약해 도장에 새긴 해인(海印)을 꿈에서 대하고 1947년 정부 수립을 기원하는 창운각을 건립했다. 6·25가 일어날 것을 알고 전쟁의 신인 관우를 모셔 승전을 기원했다. 해인을 얻으면 혼란과 고통에 빠진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김 보살은 도력높은 스님을 찾아가 개태사로 모셨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개태사를 되찾아 종단에 등록하고 복원불사 중인 현 주지 양산스님은 삼국재통일의 현장인 개태사를 평화통일 성취도량으로 삼아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한다.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는 뜻에서 창건한 왕건의 발원은 500여년만에 다시 일어나는 오늘날 개태사의 원력이다.

[불교신문3480호/2019년4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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