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등명 법등명 마음높이 달고 쓸쓸한 행복 더불어 간다

귀룽나무 벌써 꽃 피었네 하얀색이네/ 누구 들으라고 혼잣말하였을까/ 설레어 촉촉한 가지 바람만이 스치네   -‘그 봄’ 

지난해 4월. 양재천 귀룽나무 자잘한 꽃들이 바람에 몽개몽개 흔들리고 있었다. 또렷이 들려오는 영상 속의 목소리는 올봄에 시가 되었다. 나는 시인이다. 시인이었기에 2000년 여름 백담사 시조세미나에서 시조시인이신 큰스님을 처음 뵈올 수 있었다. 웃니 아랫니가 빠져 헐렁해 보이는 스님을 가운데 모시고 문인들과 사진을 찍었다. 좋은 기운이 생길 것 같아 스님 옆에 선 사진을 코팅해서 지갑 속에 지녔다. “니 내 방에 올래?” 하고 물으셨는데 나는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했다.

유심작품상이 제정되고 2003년 사천(沙泉) 이근배 선생 추천으로 첫 회 수상자가 되었다. 그해 가을. 전화 음성을 몰라보는 내게 “어른이다!” 호통 한마디로 원고청탁을 하셨고 <유심>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06년 현대시조 100주년 고유제를 만해마을에서 올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내로라하는 원로대가들 말석에서 큰스님의 서늘하고 통쾌한 격외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무렵부터 스님을 모시고 다니던 김병무 선생과 함께 서울포교당에서 가끔 공양도 올리고 산책도 하였다. 

진달래 피었구나/ 너랑 보는 진달래// 몇 번이나 너랑 같이 피는 꽃 보겠느냐/ 물떼새/ 발목 적시러 잔물결 밀려온다   -‘진달래꽃’

한강변 진달래를 보시고는 “몇 번이나 성란이랑 같이 진달래꽃 피는 걸 볼 수 있겠느냐” 하셨다. “아, 시네요!” 스님 말씀을 받아 ‘잔물결’이라는 시를 썼다. 어느 날 문단 원로들을 초대한 연회장에서 스님은 이 시를 어떻게 썼는가 말씀하시고는 낭송하라 하셨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시가 ‘진달래꽃’인 줄 알았다. 

무엇이 미더웠는지 김병무 선생은 나에게 ‘배턴 터치’한다며 서울포교당을 떠나 낙산사로 가셨다. 그 후, 스님께서 부르시면 문서수발도 하고 운전기사도 하고 하명하신 대로 시봉했다. 성균관대 강사시절. 남들 앞에서는 홍 교수라 부르며 비서실장 운전기사라 하셨다. “아침 9시까지 오너라. 만해마을 가자.” 한때는 오전에 출발하여 만해마을에서 점심공양 드시고 저녁에 귀경하시는 일정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만해마을에서는 전 현직 인제 군수와 용대리 이장, 서울에서는 고위 정치인 법조인, 예술인 석학, 선방스님 주지스님, 저자의 노소가 함께 공양도 하시고 고담준론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님 외식은 오천 원짜리 된장찌개였으나 손님들 만나실 때는 그럴듯한 음식에 반찬 가지 수가 많은 식당을 예약했다. 이 모든 공부는 시자가 된 유발상좌 혜일(慧日)의 무지갯빛 특권이었다.

“대교약졸(大巧若拙). <명자꽃>이나 <바람 불어 그리운 날>이나 크게 공교로운 것 현묘한 것은 서툴다. 졸박청고(拙樸淸高). 어수룩한 것이 높은 거야. <명자꽃>은 보통 여자들 마음을 잘 드러냈어. 황진이 같이.” 스님 말씀을 도막도막 적어 놓은 2007년 1월 16일의 일기다. 

후회로구나/ 그냥 널 보내놓고는/ 후회로구나// 명자꽃 혼자 벙글어/ 촉촉이 젖은 눈// 다시는 오지 않을 밤/ 보내고는/ 후회로구나   -‘명자꽃’

2007년 7월4일. 만해마을 운영위원장에게 전화하셨다. 만해마을에 돌 갖다 놓은 것으로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유심작품상 1회 수상자 이상국 홍성란의 시비를 세우라 하셨다. 삼조스님에게 전화하셔서 8월에 가실 때까지 잘 만들어 놓으라 하셨다. 백담사 주지스님은 시비 뒤편에 명자나무도 심어주셨다. 명자나무는 해마다 봄이면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노랗게 향기로운 열매를 달아 그 은덕을 새기고 있다. 

큰스님은 누구보다도 나의 시를 좋아하셨고 나를 알아주신 위없는 스승이다. 이 중생의 기를 칭찬으로 한껏 살려주셨다. 시를 보여 드리면 “절창이다!” 시낭송을 하면 “좋다!” 어깨를 들썩이셨다. 어디를 가도 무대 있는 자리만 보면 빙 둘러 보시고는 “여기서 시낭송하면 되겠네!” 하셨다.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타계하시기 바로 전. 백담사에서 ‘조세잡가’라는 사설시조를 판소리 아니리조로 낭송했다.

선생이 듣고는 낭송을 하려거든 저렇게 하라 했으니 스님도 그 소식을 들으셨다. 세상의 공원에 와 목마른 새들에게 시조 이야기로 시낭송으로 샘물을 나누어주라고 판을 깔아 주셨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던 시조아카데미를 서울포교당 유심아카데미로 옮기라 하셨다. “걷어찬 돌멩이도 탁, 튀어 꽃이 되는(‘새들아 오너라’)” 시절이 열렸다. 

“새털처럼 시인이 많아도 다 없어지고 몇 사람만 남는다. 미당 백수 이호우, 최치원 이규보 황진이. 큰 시인에게는 풍격(風格)이 있다. 이건 이름을 지워도 홍성란 시야. 그런들 뭐하나. 세상은 무아다. 실체가 없는 거야. 사대(四大)가 모여 홍성란 만들었지 원래 공(空)이다. 이름 하여 산이지 본래 산은 없다. 과거 미래 현재도 없다. 강물도 없다. 강물이라는 이름뿐. 강물은 상징이다. 이 세상 살아가자면 뗏목다리가 필요해. 모두가 연결고리 뗏목다리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 붙들리지 마라. 산다는 게 와각지쟁(蝸角之爭) 아니냐. 달팽이 뿔 두 개가 서로 길을 찾느라 다투는 꼴이야. 석화광음몽일장(石火光陰夢一場). 인생은 부싯돌 치듯 번쩍, 하고 지나가는 찰나 한바탕 꿈이야.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큰스님의 가르침은 나에게 주시는 대기설법이고 시론이었다. 

잡초와 돌 뿐인 땅에/ 호수 하나 덩그렇게 남겼네// 설악산 산그늘이/ 할랑하게 잠긴 그 호수// 누구나 물가를 돌며 놀랄 뿐/ 그 수심(水深)은 알지 못하니// 아 이 깊이를 다 아는 백조/ 어느 노을녘에 날아오려는가    -청화스님 (‘호수’-오현스님 영전에)

스님은 ‘호수’로 오셨을까. 차마 어린 중생들 두고 사바를 떠날 수 없었으니 산그늘도 가랑잎도 내려와 안기는 호수로는 남으셨으리. 물낯의 먼 고요. 설악(雪嶽) 무산(霧山), 그 유현(幽玄)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리. 요사이 큰스님 시세계를 총람하며 기쁨과 슬픔의 해일에 허우적이고 있다. 왜 더 여쭈어 배우지 못하고 왜 더 정성껏 받들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후회하노니 다만 옷자락도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합장하고 물가를 돌며, 필생 큰스님을 다시 배우며 환희로운 순간순간을 새겨야 하리.

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 비탈 아래 가는 버스/ 멀리 환한/ 복사꽃// 꽃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자는 봉분 하나   -‘소풍’

2018년 5월22일 만해마을 심우장. 부처님 오신 날 봉축 인사 올리러 온 사천 선생을 비롯한 시인들에게 염불축원도 하시고 전에 없던 말씀을 하셨다. “문인 호상은 사천이 하고, 승단 호상은 정휴스님이 하고… 행장은 다 빼고 서너 줄만 짧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때는 몰랐다. 잊히지 않은 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했다. 이 순간까지도 내 기억 속에 스님은 손잡고 계신다. 나는 시조시인이기에 큰스님 가까이 시봉할 수 있었고 시조시인이기에 2018년 4월 5일 연필로 쓰신 한글선시조의 완성, ‘무산십현시(霧山十玄詩)’와 ‘착어’를 받아 큰스님의 열반송을 세상에 전송하는 광영을 입었다. 

여기는 입, 코, 돌에도 표정이 있네// 이마 주름도 날 좀 닮았지?// 나직이/ 돌아보던 목소리 흐르는 물가   -‘백담사’

세상에 와 행복이 있다면 큰스님 가까이서 육성 법문을 듣고 말씀처럼 ‘죽을 둥 살 둥’ 겨우 시봉한 일이다. 세상에 와 자랑이 있다면 시자 혜일이라 이름 받은 일이다. 어리석은 사랑도 어리석은 미움도 오래가지 않는다. 오래가지 않아 슬프고 오래가지 않아 다행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는 끝내 노래는 버리지 못하리. 큰스님 말씀을 시론으로 자등명 법등명 마음 높이 달고 쓸쓸한 행복 더불어 가고만 있다. 

홍성란 시인

[불교신문3488호/2019년5월15일자]

홍성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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