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은 가시덤불 안고 사는 것과 같다

 

여유 있어야 자신과 타인 이해
용서하면 번뇌 씻어지고 소멸
몸과 마음 일념…‘선정’ 이뤄
선정에 들어야 감정 정화한다

사띠의 알아차림은 마치 어부가 그물을 치는 것과 같다. 어부가 그물을 쳐서 모든 물고기를 잡아들이는 것처럼 크고 작은 행위와 그 의도들을 모두 아는 것을 사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부에게 이 모든 물고기가 다 필요한 것은 아니고 일정 크기 이상만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리고 난 다음에 어느 것이 불행의 원인(不善法), 어느 것이 행복의 원인(善法)인지 구분해서, 선법은 증장시키고 불선법은 소멸시키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것을 택법(擇法)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선과 불선의 행(行)은 신체적 행위를 일으키는 심리적 의도이므로 심적인 부분에 해당된다. 마음에 탐(貪)이나 진(瞋)이 있으면 있다고, 없으면 없다고 알고, 탐이나 진의 마음이 발생하면 그것을 탐이나, 진이라고 알아차리고, 탐이나 진이 사라지면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심리적인 장애(감각적 욕망, 성남, 해태와 혼침,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가 사라질 때까지 노력하는 것을 정진각지(精進覺支)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띠는 택법과 노력이라고 하는 각지(覺支)로 계속 성장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마치 어부가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아오면, 잡아온 물고기를 바다로 보낼 것과 잡아갈 것을 고르는 작업을 하는 것처럼, 사띠는 택법으로 전환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 사띠의 3가지 측면, 즉 알아차림, 택법각지, 정진각지가 충족되었을 때 마음과 몸이 지극히 기쁘고 편안해진다(喜覺支, 輕安覺支). 알아차림으로 마음과 몸이 기쁘고 편안해진 상태를 정(定)이라고 하고, 이 정의 상태에서 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씻기고(定覺支), 법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평정(upekh, equilibrium)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을 오온으로 배대하면 칠각지에서 항상 바라봄의 역할은 식(識)이고, 택법의 역할은 상(想), 노력은 행(行)이다. 또한 이후에 마음과 몸의 기쁨(喜)과 즐거움은(樂)은 수(受)와 색(色)이다.

자나(禪)와 감성의 정화

인간은 매일 매일 상처를 받으며 산다. 모든 존재는 각각의 자아를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자아를 집착하는 자는 마치 가시덤불을 안고 있는 것과 같아서, 삶을 사는 동안에 상처를 받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이 상처를 씻지 않고 놔두면 곪아서 그것이 후일에 충동적인 ‘감각적 욕망’에 중독되어 현실을 도피하거나 ‘성남’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상처를 매일 매일 씻어주어야만 ‘감각적 욕망’에 중독되거나 ‘성남’의 늪에 빠지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삼매를 경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삼매는 세수하거나 몸을 닦는 것 같고, 지혜는 암을 도려내기 위해서 수술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먼저 매일 삼매를 닦아서 더러운 때가 쌓이지 않도록 정화해야 된다. 삼매를 닦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부조화된 상태에서 불행을 끌어당기게 된다. 

자나(禪)는 해탈(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 요소인가 아니면 선택적 요소인가. 그것은 필수적 요소이다. 설사 위빠사나 수행자라 할지라도 순간삼매를 체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혜해탈(慧解脫) 수행자도 삼매를 경험해야 하는데, 탐진치 삼독을 여읜 삼태를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대인삼매(大印三昧)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삼매에서만 감정이 정화되는가? 그것은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첫째, 내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성남, 탐착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둘째, 몸과 마음이 기쁜 상태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서 화나는 기억을 보게 되면 오히려 더 화가 나기 때문이다. 셋째, 몸과 마음이 기쁜 상태에서 바라보면 나와 나에게 상처를 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발생하고, 이 마음의 여유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면 마음의 번뇌는 바로 씻어지고 소멸해버린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이 일념이 되어 기쁜 상태인데, 그것을 바로 선정(禪定)이라고 하고, 그러므로 선정에 들은 사람만이 스스로의 감정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3489호/2019년5월25일자]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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