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분별 작용으로 드러나는 ‘현상’

제행은 마음의 작용
제법은 이해한 세상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모든 유위법은
꿈, 환상, 거품,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여라.

<금강경>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게송이다. 유위법에 대한 이해가 우선 필요하다. 법은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구분한다. 일단 유위법은 생주이멸이하고, 무위법은 불생불주불이 불멸한다.

유위법(有爲法)을 간혹 글자 그대로 ‘함이 있는 법’이라 번역한다. 그런데 이 번역은 단순 글자 번역이라 와 닿지 않는다. 또는 유위법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존재’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인위적’이라는 말은 명확하지 않다. 혹시 인간의 손길을 말한다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은 인위적이지 않으니 유위법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자연 또한 생주이멸한다. 유위법이다.

연기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마음을 언급하면 주관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래서 마음을 떠나서 이해하려고 한다. 연기법에 대한 이해도 그런 측면이 강하다. 마음 작용 간의 관계인 내연기보다는 사물 간의 관계인 외연기로 우선하여 이해한다. 내연기와 외연기라는 용어가 생소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이전 글에 언급하였다.

유위법(有爲法)에서 위(爲)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행(行)과 같은 뜻으로 마음의 분별 작용이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으로 조작하여 이해한 모습일 뿐이다. 만약 그 자체라면, 수건은 항상 수건이어야 하고, 컵은 항상 컵이어야 하고, 콜라병은 항상 콜라병이어야 하고, 개 짖는 소리는 누구에게나 멍멍, 열차 소리는 누구에게나 칙칙폭폭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 따라 마음 작용으로 수건 또는 걸레로, 컵 또는 필통 또는 꽃병으로, 콜라병 또는 신의 선물로, 멍멍 또는 바우와우로, 칙칙폭폭 또는 추추로, 그렇게 드러난다.

지금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분별 작용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다. 이때 ‘마음의 분별 작용으로 드러난 현상’을 유위법이라 한다. 마음 하나 일어나는 것이 생(生)이고 마음 하나 사라지는 것이 멸(滅)이다. 이러한 분별 작용으로 생겨나고 사라질 유위법이기에 ‘꿈과 같고 환상과 같아서’ 그것이라고 할 자성이 없다. 단지 마음 작용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여 나타난 것일 뿐이다. 제법무상(諸法無常), 제행무아(諸行無我)다.

경전에는 ‘제법무상, 제법무아’ 또는 ‘제행무상, 제행무아’로도 나타낸다. 제행(諸行), 제법(諸法), 일체(一切)는 세상 자체가 아니다.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이다. ‘제행(諸行)’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마음 작용[行]의 측면에서 나타낸 것이고, ‘제법(諸法)’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法]의 측면에서 나타낸 것이다. 

목경찬 천안 각원사 불교대학 교수
목경찬 천안 각원사 불교대학 교수

[불교신문 3814호/2024년4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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