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 위기에도 자리 지키며 자비행 펼친 조선 불교

병자호란 당시 관악산, 청계산, 수리산에 있는 사찰들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정을 구하기 위한 전진기지이자, 백성들을 보호하는 구국애민의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은 남한산성 서문 성곽.  불교신문 자료사진
병자호란 당시 관악산, 청계산, 수리산에 있는 사찰들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정을 구하기 위한 전진기지이자, 백성들을 보호하는 구국애민의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은 남한산성 서문 성곽.  불교신문 자료사진

산사 남한산성 지원 요충
청나라에 맞선 저항 기지

백성들을 보호하는 ‘거점’

蘭若蕭條雲水間(난야소조운수간)
塵埃滿榻戶長關(진애만탑호장관)
山僧亦被聲名誤(산승역피성명오)
一出松門久未還(일출송문구미환)

절은 구름과 시내 사이에 스산하고/ 먼지 가득한 평상, 문엔 빗장 걸렸네/ 산승도 명성이 잘못 소문나/ 한번 절문을 나가서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하네 

- 제운수암(題雲水庵) 암주응상사(庵主應常師), 부남한산성동역(赴南漢山城董役)

17세기 초 허적(許, 1563~1640)이 운수암(雲水庵)을 두고 읊은 시이다. 허적은 1623년과 1626년 사이에 금강산을 유람했으며, 운수암은 금강산에 있던 암자였다. 모처럼 깊은 산 속에 은거하고 있던 벗을 찾아왔건만, 이미 스님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기대했던 벗을 만나지 못한 속객의 눈에 빼어난 경관도 스산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스님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부제에 따르면 당시 주지였던 응상스님(應常師)은 남한산성 축성을 감독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남한산성은 1595년에 옛 산성 자리에 다시 쌓은 이래로 1621년, 1624년 각각 개보수를 거쳤다. 응상스님은 1624년 총융사 이서(李曙)의 책임 아래 각성(覺性, 1575~1660) 스님이 팔도도총섭으로서 전국의 스님들과 함께 3년 동안 피땀으로 작업했던 시기에 부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완비된 남한산성은 청나라 대군을 48일 동안 막아냈다.

남한산성 안에 있던 개원사(開元寺)는 임금을 따라 들어온 관료와 장수들의 숙소로 쓰였다. 눈이 쌓여 나무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개원사의 행랑채를 한 채씩 뜯어 불을 피우는데 썼다. 그 덕에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은 잠시나마 몸을 녹일 수 있었다. 국청사를 비롯해 여러 절의 스님들은 산길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차출되어, 각 도의 관찰사·병마사들에 비밀 명령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한편 남한산성 축성 후 화엄사에 주석하던 각성 스님은 항마군(降魔軍)이라는 3,000명의 의승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스님은 전라도의 근왕병과 함께 북상하다가, 조선의 항복 소식에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전란을 겪으며 불교는 국가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했지만, 전후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스님들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무명의 헌신이었다.

병자호란에서 헌신한 것은 스님들만이 아니었다. 각지의 사찰이 피난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1650년 척화파로 몰려 의주의 백마산성에 안치되었던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이 쓴 <병정일기(丙丁日記)>에는 남한산성 주변의 관악산, 청계산, 수리산의 산사(山寺)들이 병자호란에서 수행한 역할이 잘 드러나 있다.

1636년 사간원 사관이 된 조경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탄핵하다 해임돼 고향 포천에 내려와 있었다. 병조호란 발발 소식에 임금인 인조를 수행하기 위해 상경했는데, 대가(大駕)가 강화도로 향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움직이다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안전한 곳으로 피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임금을 지켜야 하는 의리를 다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 관악산이었다. 젊었을 때 자주 올라 지형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인근 과천(果川)의 현감인 김염조(金念祖)와 교분이 있어 그와 함께 향병(鄕兵)을 모아 신하로서 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20세기초 남한산성 내(內) 모습.
20세기초 남한산성 내(內) 모습.

사찰은 피난민의 ‘안식처’
스님들 유격대 핵심 전사
물적 정신적 지원한 보살

“새벽에 김군[김경]이 나는 듯한 걸음으로 먼저 불성사(佛性寺)에 들어가고 내가 뒤이어 이르니, 피란 남녀들이 꽉 모여 있는 가운데 현감[김염조]이 승려들의 뒷방에 움츠리고 있다가 서로 손을 맞잡고서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의병을 불러 모아 남한산성을 위하여 개미 새끼만한 구원병이라도 되기로 논의하였다.”(<병정일기>, 12월 19일)

불성사는 관악산의 남서쪽에 있는 절이다. 조경은 낭천군 김경(金坰,  1583~1646), 과천현감 김염조와 함께 산속에 있는 피난민들을 찾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용감한 장정과 건장한 스님들이 우선 대상이었다. 이보다 앞서 김염조는 자기 고을 관아 창고에 있는 무기와 식량을 불성사와 묘덕사(妙德寺) 안에 운송해 놓은 터였다. 자원자가 50명이 넘어 사기가 충천했으나, 다음날 청나라의 철갑 기병 30여 명이 산에 오르자 다 달아나 버렸다. 불성사에 있던 피난민들이 많이 붙들려갔고, 피난민과 사찰의 재물들도 약탈당했다.

조경 일행은 이 상태로는 적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불성사보다 더 고지에 있고 지형이 험준한 영주대(靈珠臺)에 오르기로 한다. 청나라 군대의 습격을 겪은 부하들이 관악산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며 수원과 용인 사이로 빠져 나가 충청도로 가겠다고 산을 내려갔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승려 한 명에게 앞서 가며 길을 안내하도록 하고서 우리 세 사람은 칼을 짚고 따랐다. 이때 산 위의 달은 하늘 가운데 떠 밝았고 골짜기마다 고요하였는데, 좁은 길에 바윗돌이 험하고 많아 발을 헛디뎌 거의 떨어질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영주대 아래 작은 암자에 도착하니, 피란한 남녀 및 승려들로 빽빽하게 가득 차 있어서 우리들은 방안 깊숙이 들어 앉았다.(12월 20일)”

영주대는 관악산의 주봉 하나인 연주대(戀主臺)이고, 그 밑에 있는 작은 암자는 연주암(戀主庵)을 말한다. 산을 내려가지 못한 사람들이 위로 몰려든 상황이었다. 다음날 연주대에 오른 조경 일행은 남한산성을 바라보면서 울음소리를 삼키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그들은 경기도 안의 수령들과 사대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격문을 지었다.(경기도 여러 고을의 수령과 경대부 및 피난한 사람들에게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오랑캐를 토벌하자고 알리는 격문(告京畿列邑守宰及卿大夫避亂人等同興義旅以討虜賊檄)’, <용주유고(龍洲遺稿)>)

이렇게 관악산의 산사는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전진기지이자 지역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거점이 되었으며, 스님들은 일급의 궁수로 변했다. 조경 일행의 강력한 뒷배였다. 이후 이들은 날마다 연주대에 올라 남한산성을 비롯하여 시야에 들어온 인근 지역의 청군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뒤늦게 달려온 지방의 군대에게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김경은 묘덕사, 불성사, 연주암을 오가면서 승병과 민간의 장정들을 모았다. 이렇게 모인 승려와 속인들은 산을 내려와 과천 향교 뒤쪽에 매복해 있다가 곡식을 약탈하고 귀환하던 적병을 활로 공격하기도 했다.

관악산의 산사를 근거지로 이루어진 이들의 유격대 활동은 향화인(向化人: 오랑캐에 붙은 사람)이 청나라 군대에 밀고함으로써 위기에 봉착한다(1월 5일). 청나라 수색대가 연주암까지 이르자 유격대는 묘덕사와 불성사 사이를 오가면서 매복 작전을 펼쳐 수차례 적군을 물리쳤다. 조경은 함께 청나라 군대를 물리친 스님들을 의병(義兵)이라 규정하고, 그 이름을 기록했다. 응준(應俊)·신환(愼環)·신담(愼淡)·현철(玄哲)·성원(性元) 스님이 그들이다.

대규모 수색대가 예상되자 조경 일행은 스님들과 헤어져, 현재의 안양 비산동으로 내려와 안양교(安陽橋)를 지나 수리산으로 퇴각했다(1월 7일). 이들은 수리산의 사신사(舍身寺: 謝身庵의 오기)를 근거지로 청나라 추격군을 따돌리다, 다시 관악산으로 이동하여(1월 15일) 산막(山幕)과 석굴을 전전하며 적군을 피했다. 의승군이 흩어지며 급격히 위축된 그들은 마침내 청계산으로 옮겨가(1월 26일) 골짜기 사이에서 적을 피하면서 희상(熙尙) 스님과 원통암(圓通庵) 스님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정축년 2월 3일, 조경은 청계사(淸溪寺) 극륜(克倫) 스님의 방에서 결국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한 사실을 듣게 된다. 청계사 뒤편 고개에 오른 그의 눈에 인덕원에 주둔한 청나라 후진(後陣)이 보였는데, 흰옷을 입은 조선인 포로가 반이 넘었다. 청계사도 위험하다고 판단한 조경은 수월함(水月菴)으로 피했다가, 청계사·백화사(百花寺)로 옮겨 다니곤 했다. 2월 14일 관악산에서 피난했던 일행들을 만나서 다시 산에 올라 연주암에서 ‘갓’을 찾고, 다음날 적군이 철수했음을 확인하고 한양으로 출발하는 것으로 일기는 끝을 맺는다.

이렇듯 서울 외곽의 과천과 안양, 의왕 지역에 걸친 관악산, 수리산, 청계산의 여러 사찰들은 피난민들의 안식처였으며, 청나라 침략군에 맞서는 저항의 기지였다. 스님들은 유격대의 핵심 전사였으며, 피난민들에게 물적·정신적 지원을 해준 보살이었다. 마침내 청계사에서 안돈하게 된 조경은 노스님과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전란이라는 공동체의 위기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비행을 펼친 조선 불교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저녁에 청계사로 옮겨 묵었는데, 지전(智全)·방전(房全) 스님은 내가 포의(布衣)로 산방(山房)에서 독서할 때 밥을 지어 주었던 승려들이다. 모습이 다 늙어서 나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온전히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밥과 반찬을 갖추어 먹도록 해주니 옛정을 족히 볼 수 있었으니, 치도(緇徒: 승려)의 자비가 사실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2월 4일 일기)”

김일환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조교수

[불교신문 3814호/2024년4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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