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은 내가 먼저 양보해야 이룰 수 있어” 

출가란 집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사로운 일에 매달려 욕심내고 다투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일대 방향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을 얽어매는 낡고 묵은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 그렇게 해서 새로워지는 것 또한 출가의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의 출가는 우리들 삶의 마당에서 순간순간 실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영축총림 통도사 서축암. 그 곳에는 총무원장과 총림의 부방장을 역임한 종단의 원로의원 초우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월하스님 입적 이후 후임 방장 추대문제로 종단 내외에서 갑론을박이 계속되자 총림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실질적으로 방장역할을 해왔지만 모든 것을 내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큰 혼란을 우려하는 이들이 종단내외에 적지 않았지만 스님의 이 같은 결단으로 총림은 물론 종단도 화합승가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승가’라는 말에는 본래 화합의미 담겨
  수행자는 몸과 마음에 출가정신 새겨야 

 

<사진> 중앙과 지방에서 종무행정을 두루 경험한 초우수님. 스님은 화합을 강조한다.

부처님 출가재일(음2.8)을 아흐레 앞둔 지난 6일 서축암(西鷲庵)은 다시 ‘초발심으로 돌아온’ 원로가 주석하고 있는 곳이어선지 암자는 잡티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하고 고요했다. 1996년 월하스님과 대화주 수련화 보살, 원감인 원행스님의 원력이 하나가 돼 건립된 ‘신형 암자’라고 한다.

대웅전 역할을 하는 ‘삼계주(三界主)’ 앞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다보탑 모양의 사리탑이 있고 현무(玄武)와 주작(朱雀) 편액이 걸린 당우가 양쪽에 배치됐다. 참배객이 발길이 뜸해 보이지만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두 세 번의 인기척 끝에 점심공양을 막 끝낸 스님을 만났다.

20여 년 전 대구 불교를 결집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스님은 어느새 백설을 품은 초봄 영축산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총무원장 당시부터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간 터라 조심스럽게 2년 전 일을 꺼냈다. 월하스님 입적 이후 계속해오던 방장 역할을 어떻게 한 순간에 놓을 수 있었을까?

“아쉬울 게 없어요. 어떤 소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나이 들수록 중책은 오히려 놔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스님은 지금의 원로의원 소임도 본래 안 맡고 싶었다. 당시 부방장이었던 청하스님 입적으로 공석이 된 그 자리를 총림을 위해 맡아 달라는 대중들의 간곡한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덕분에 선학원에 등록돼 시비가 될 만한 사찰도 정리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대구사원주지연합회와 대구불교회관, 갓바위(선본사) 운영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잡음이 일기 시작하면 미련 없이 물러서곤 했다. 스님은 그런 자신을 ‘성격이 좀 과한 데가 있다’ 보니 결국 ‘제대로 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단점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을 뒤집어 보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스님은 더 단호해졌다.

“고집 피워 밀어붙이면 되는 일도 있겠죠. 하지만 분규밖에 더 생기겠어요? 그것은 내가 이긴다 네가 이긴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종단 분규만 확산시키는 격이니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왕자로서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무소유의 삶으로 돌아가 일체의 생명과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

“승가라는 말에는 본래 화합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습니까? 화합이 안 되면 정치도 사회도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되기 어렵습니다. 화합은 고집 부려서는 절대 안 되는 일, 내가 먼저 양보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해 낼만큼 화합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래 입은 옷이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과 같이 몸과 마음에 출가수행자의 모습이 배어 있어야 한다.

스님은 하심(下心)과 인욕의 표본으로 널리 알려진 구정(九鼎) 선사에 얽힌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행자에게 인욕과 하심을 가르치기 위해 노스님은 부엌의 가마솥 옮겨 거는 일을 시켰다. 비단 장수하던 청년이 노스님이 시키는 대로 흙을 파다 짚을 섞어 아궁이를 만들고 솥을 옮겨 걸었다. 해가 다 기울어갈 즈음에 들어와 다른 쪽 아궁이로 옮겨 걸라는 스님의 말에 청년은 그 다음날 또 정성스레 다른 아궁이를 다듬고 솥을 옮겨 걸었다. 옮겨 걸면 잘못됐다며 야단치고 트집 잡고 허물어버리기를 아홉 차례 반복했지만 청년은 불평 없이 묵묵히 스님이 시키는 대로 다시 할 뿐이었다. 인내심도 인정받고 솥을 아홉 번 고쳐 걸었다는 뜻에서 구정(九鼎)이라는 법명을 받아 훗날 선사로서 큰 명성을 떨치게 됐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입산 출가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옛날에는 서너 살, 대여섯 살에 절에 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장단점이 있겠지만 어른들을 모시고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스님이 되어 갔어요. 하지만 요즘은 고졸이상 출가를 허락하다보니 사회적으로나 종단적으로 스님 자격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예요. 그렇지만 (남자의 경우) 군 복무 마치고 사회생활 하다 거의 서른 살이 넘어 출가하다보니 겉모습부터 스님 같지 않은 이들이 많아 보입니다. ‘습’이 덜 든 것 같아요. 겉모습뿐 만아니라 말과 행동에서도 출가수행자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선지 스님은 교육방법에 대한 생각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한글세대가 대부분인 요즘 출가자들의 경우 한문경전으로 공부하다보면 음을 익히고 뜻을 새기는 데 시간 다 보내 경전 몇 권 제대로 보기 어렵다”는 것. 역경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 이외에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기초교육도 마찬가지. 치문 습의 같은 기초를 익히게 한 후 기본교육은 중앙승가대 같은 곳에서 일괄적으로 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15살 때 출가한 스님에게는 80명이 넘는 총림에서 채공과 갱두 소임을 보느라 단 1분도 마음껏 쓸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같은 연배에 스님들 대부분이 그랬지만 ‘공부’를 생각하면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총림이기에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선지식들이 즐비했다. ‘무토배기’ 공부라 어려웠지만 효봉스님에게 치문을 배우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화두를 받는 영광을 누렸지만 시시때때 절을 옮겨 다니는 일이 많아 욕심껏 공부를 하지 못했다.

동화사에서 관응스님, 통도사에서 운허스님에게 잠간씩 배울 기회를 가졌지만 부산 범어사, 금수암, 대구 관음사를 거치며 부산 대각사에 머문 적이 있다. 그 곳에 종무원이 있을 때 강원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 초-중-고등과정을 거치면 동국대에 입학자격을 받을 수 있는 제도까지 생겼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훌륭한 강사를 모시고 싶었지만 그 역시 여의치 않아 얼마 못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늘 자신보다는 함께 잘되는 길을 고민하다보니 한 곳에 집중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렇게 중앙과 지방의 종무행정을 두루 맡아 살다보니 칠순이 훌쩍 넘었다.

스님은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주지스님이 서축암을 마련해줘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사진촬영을 위해 경내를 포행하며 이 곳 저곳을 안내해 주는 스님의 모습에 <축산문집>의 ‘통도사 전경’이 스쳐간다.

“비취빛의 울창한 산림 속에 절이 있으니/ 솔 파도와 대 물결이 함께 노래하누나// 채색 구름 병풍 되어 신령한 곳 보호하고/ 향풍(香風) 가득한 법당에는 부처님 기운 깊네// 푸른 눈 열릴 때는 먼저 웃음 터뜨리고/ 붉은 입술 정해진 곳 반드시 관음(觀音) 계시네// 높은 당간 탑 세움은 자장율사 업적이니/ 교화 받은 승속들이 어찌 많지 않았으리

(寺在千蒼萬翠林/ 松濤竹浪共相吟// 彩雲屛障靈區護/ 畵閣香風佛氣深// 碧眼開時先放笑/ 朱脣定處必觀音// 高竿建塔藏師蹟/ 敎化幾多緇素襟).” 
 

/ 초우스님은…

1933년 해인사 인근 마장리에서 태어난 초우스님은 15살 되던 해인 1947년 해인사에서 동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같은 해 10월15일 해인사에서 효봉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1957년 통도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한 후 1958년 3월15일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3년 동국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했으며 통도사 주지와 총무원의 재무부장 감찰위원, 중앙종회 부의장을 거쳐 제19대 총무원장(1981.6.10~1982.1.7) 소임을 맡기도 했다. 현재 종단의 원로의원이며, 구하(九河)스님 문도들로 구성된 축산(鷲山)문도회 회장을 맡고 있다.

5년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랬듯이 스님은 지금도 역시 총림의 ‘어른’을 모시는 일이 즐겁다. 방장 스님의 덕화(德化)로 총림 대중들의 공부가 순일해지고 그로 인해 화합하고 모든 것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원로회의 등 나들이 할 때는 방장 원명스님과 동행할 때도 있다. 바람이 있다면 불보종찰(佛寶宗刹) 통도사가 계(戒)의 근본도량으로 늘 거듭나는 것이다. 전국의 모든 출가자들이 이 곳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地大刹)’ 영축총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불교신문 2409호/ 3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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