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불가를 부르는 전국의 불교합창단원이 나의 상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찬불가로 수행하며 포교해 온 한국불교음악협회 이사장 운문스님은 2년 전 자신이 창건한 서울 구기동의 운문사마저 ‘불교음악회관’ 건립을 위해 기탁하고 지금은 임시 거처에 주석하고 있다. 늦더위 속에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흩뿌리던 지난 20일 홍은동의 한 빌라에서 스님을 만났다.

 

 

“부처님이 말려도 찬불가 만들 겁니다”


  불교음악회관 건립 위해 사찰 기탁…임시거처 주석

  “전국의 불교합창단원이 모두 내 상좌들이라 생각”



세수 여든하나의 스님이 지금까지 작사한 찬불가는 1000곡에 달한다. 1950년대 초 청소년 포교에 원력을 세우고 만든 곡들이 고스란히 현대 창작찬불가의 토대가 됐다. 정화불사 직후 1956년 목포에서 어린이 포교를 시작한 스님은 1961년 연화어린이회를 창립한 데 이어 서울 개운사 보리수 어린이회, 운문사 만다라 불교학생회, 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등을 창립했다. 또한 어린이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포교를 위해 <불교동요집> <어린이찬불가>를 발간하는 등 50여 년에 걸쳐 찬불가 보급을 통한 청소년 포교에 앞장서왔다.

지난해 펴낸 <대교주 찬양가>집이 대표적 사례. 스님이 50여 년 동안 만든 가사 중에서 364수를 모아 장편.성가.동요찬불가 편 등으로 엮은 것이다. ‘성불의 길을 찾아서’ ‘보현 삼매의 노래’ 등 장편 가사는 근래 저작물이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작품도 다수 수록돼 있다. ‘산회가’ ‘사월초파일’ 노래 등 법회와 각종 행사 때 불리는 노래도 수두룩하다.

스님의 ‘찬불가를 통한 청소년포교’는 점술과 기복신앙에 젖어 있는 기성 신도들을 대하면서 시작됐다. 선방이외 특별한 경험이 없던 1950년대 당시 점술 등에 의존하며 부처님의 정법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기성세대는 금방 안 고쳐지니 새싹부터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아이들을 길러 30년이 지나면 ‘우리 불교가 달라질 것’이라는 확신에서다. “노래가 있는 법회는 지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곧바로 목포 정혜원에서 시작했다.
“30여 명이 다락방에서 재미있게 잘 했어. 동네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다가 우리가 지나가면 쫓아와 합장하며 인사하고 돌아가는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사진> 60여 년을 거의 찬불가 작사와 청소년포교를 위해 헌신한 스님은 계획이 있다면 이것 하나라고 말했다. “인연 있는 이들과 내세에 다시 만나 찬불가 불사를 많이 하는 것”

학생들이 절에 오는 것도 그런데 절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 스님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그 불사에 빠져들었다. 설화와 경전이 많아 노랫말은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음악공부를 한 적이 없는 스님이기에 처음엔 모 학교 교가를 개사해 부르게 하다 중학교 음악교사를 통해 첫 곡을 제대로 띄울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지금도 유명한 ‘경배하세’다.

“(스님이 시도한) 찬불가 중에서는 최초의 곡이 나온 거야. 나중에 서울에 와서야 이미 1920년대에 용성스님이 불교음악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김해포교당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도 잊을 수 없는 일화 중 하나다. 책을 펴내는 데 지원해 준 김해포교당의 석정스님(현 중요무형문화재 불화장)에게 인사차 들렸을 때다. 아이들의 찬불가 소리가 들려왔다. 목포에서 지은 곡이었다. <불교성전>을 어렵게 펴내면서 그 안에 목포에서 지은 찬불가를 넣었는데 그 노래를 아이들이 부르는 것이었다. 시름을 털어내고 다시 정진을 시작했다.

“용기를 얻은 거야.”

서울 대각사에서는 법사 신분으로 어린이법회를 하며 수건돌리기 등 지금의 레크리에이션을 하다 선방 스님들의 눈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주지 소임도 몇 번 맡았지만 거의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조계사에서는 ‘100일 주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모든 것을 청소년들에게 쏟다보니 대중들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월성-정인섭-이찬우 선생과의 인연이 깊어가면서 현대 찬불가의 역사가 하나하나 만들어졌다. 정인섭 선생과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간이 짧아 곡은 많지 않지만 ‘집회가’ ‘산회가’ ‘삼귀의’ ‘보현행원’ 등 다 좋은 곡이야. 서울에서 어른들 위주로 만든 찬불가지.” 추월성을 통해 저변을 넓히고 정인섭을 통해 찬불가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셈이다.

<사진> 지금은 너무나 중요시되고 있는 어린이법회. 하지만 1960년대 사찰에서 어린이법회를 진행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사진은 60년대 조계사 어린이 법회 기념사진.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명 작곡가를 모시다보니 보시도 적잖이 필요했다. 결국 인연 있는 신도들을 찾아 진주로 갔다. 마침 연화사 조실방에 머무르던 은사(인곡)스님을 만나 ‘일대사’를 치르고 말았다. 신도들의 말을 들은 은사의 꾸중이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이 놈의 자식아. 중이 됐으면 참선을 하든지 경을 배우든지 염불을 해야지 노래가 다 뭐냐?” 지금 같으면 ‘삼가하겠습니다’하고 한 걸음 물러섰을 텐데 그 때는 외람되게도 은사 말씀이 귀에 차지 않았다.

“스님이 아무리 그래도 저는 노래합니다. 설사 부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셔도 저는 할 겁니다” 당장 나가라는 호통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헤어진 은사가 해인사에서 열반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스님은 아이들의 손을 놓지 않고 다비장을 맴돌았다.

“그렇게 (찬불가에) 정신이 없었어. 주지를 수없이 포기한 것도 (찬불가) 이 거 하려고 그랬던 거야. 목포에서 세운 30년 원력이 평생이 되어 버렸어.”

수행이력과 달리 스님은 10대 중반 청소년시절 입산 출가했다.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던 무풍스님의 누더기를 얻어 입고 나타난 형 남장스님과의 좌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목련존자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민공출’을 위해 주민들을 한참 괴롭히던 일제말기 스님이 살던 마을도 부역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갔다 올테니 (마을 사람들) 부역시키지 말라”며 (인민공출) 갔다 온 뒤 형님이 머무르고 있는 ‘정이(鄭李)’암으로 간 소년은 두 세대를 거치는 찬불가의 역사를 쓰며 지금의 운문사에 주석하고 있다.

행자 때 습관이 이어져 오랜 세월 홀로 수행하면서도 스님의 일상은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도 스님은 새벽예불 후 5시면 아침공양을 손수 해결한 뒤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나이 먹으니 경(經)도 많이 못 읽어. 신도들과 함께 ‘108참회문’을 주로 독송하지. 하루 6~7번. 자꾸 발원하는 것이지. 피곤하면 자고. 만상삼라도방하(萬象森羅都放下) 갈즉전다곤즉면(渴則煎茶困則眠). 이 말이 참 좋아. 모든 것 다 놓아버렸거든. 젊을 때부터 내 구호가 방하착(放下着)이야. 목마르면 차 다려 먹고 피곤하면 잠잔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스님의 발원도 변함이 없다. “인연 있는 사람은 다시 내세에 만나 찬불가 불사 많이 하는 것”이다.




운문스님은…


50여년간 1000여곡 작사…포교대상 2회 수상



192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운문스님은 1944년 양주 망월사에서 인곡스님은 은사로 득도,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47년 합천 해인사에서 상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및 대승보살계를 수지했으며 1953년 해인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같은 해 부산 범어사 수선안거 이래 제방 선원을 찾아 정진했다.

이후 여수 흥국사, 진주 연화사, 대구 대안사, 서울 연화사 주지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총무원 재무부장 등의 소임을 맡기도 했으나 얼마 안 있어 찬불가 노랫말과 어린이포교를 위한 현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1950년대 초 목포 정혜원에서 찬불가를 통한 어린이 포교를 시작, 서울의 개운사와 석불사를 비롯해 20여 곳의 어린이회 창립을 직간접적으로 이끌었으며 1966년에는 청소년교화연합회를 창립했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포교대상 공로상(1987년), 제3회 포교대상 본상(1990년) 등 포교대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2001년 사단법인 한국불교음악협회 이사장에 추대된 이후에도 <신도용 찬불가>와 <합창곡집>1~3권, 찬불가 가사 모음 <대교주 찬양가>를 발간했다.


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462호/ 9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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