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응스님은 인연이 소중함을 강조하며 항상 ‘하심’이 수행의 기초이자 전부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나’를 비우면 국가간 다툼도 없어집니다”


   “‘나’라는 존재 씻어버리면 ‘너와 나’ 간격 없어져” 

     80화엄경 등 많은 경전 사경하며 평생 참선수행

크도다! 온 법계를 머금었고/ 드넓어 연기함이 다함이 없도다/ 한없이 청정한 법성의 종이에/ 온갖 꽃으로 장엄하였네(大也包含遍法界 方廣也緣起無盡 無邊淸淨法性紙 寫成種種華藏嚴). 원응 노사(老師)가 수행과 원력으로 금니(金泥)로 화엄을 사경하여 대중과 배관하니 화엄회상이라 법신의 구광이 사무치고 화엄성중이 위요할세 처처가 진법계라 법계가 두루 화기롭다. 노덕의 이 공덕으로 민족이 화합하고 인류는 자애하고 불일(佛日)은 증휘(增輝하리라.” (2004년 제3회 원응스님 화엄경금니사경전의 법전 종정예하 법어)

화엄경 60여 만자 사경(寫經)으로 잘 알려진 원응(元應)스님은 지리산 벽송사를 중창하고 서암정사를 창건한 선사(禪師)다. 서암정사가 자리한 지리산은 6.25때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생사를 달리한 곳이다. 20대 후반 조용한 수행처를 찾던 중 지리산 벽송사에 발길이 닿은 원응스님은 그 원혼들을 위로하고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기원하며 불사를 시작해 벽송사를 중창한데 이어 인근의 서암(瑞)을 수행처로 일궈냈다. 27살의 청년 선객으로 지리산에 발을 들여 놓은 뒤 세수 일흔넷까지 두 개동에 불과하던 벽송사를 재건하고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린 석굴법당을 구비한 서암까지 창건했으니 수행을 통해 비극의 땅 지리산을 ‘안양국’으로 만든 주인공인 셈이다. 지난 10월14일 석굴법당 옆 바위틈에 자리한 서암정사 염화실에서 스님을 만났다.

사경은 부처님 말씀을 하나하나 글자로 새기며 그 뜻을 눈과 입 그리고 가슴으로 새기는 수행방법으로, 마음이 평정되지 않으면 글자는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경은 산란한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통일된 정신상태를 유지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좋은 수행방편이라 할 수 있다. <법화경>에서는 또한 “십만억 부처님께 공양한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사경의 공덕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사경원이 있을 정도로 사경수행은 한 때 크게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고려 시대이후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사경은 근 십여 년에 걸쳐 완성한 원응스님의 <화엄경> 사경으로 다시 한 번 관심을 모으는 계기가 됐다.

“은.법사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화엄경 사경이 남아 있는 게 없다고 참 아쉽게 얘기하셨어요. 이북 금강산에서 한 번 본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다고. 모든 불사가 다 원(願)을 가지고 하듯 지리산 희생영가의 명복을 빈다는 발원을 가지고 15년에 걸쳐 80권 화엄경을 완성했어요.” 문맥이 이상하거나 오자(誤字)라는 느낌이 들면 여러 권을 대조해 가며 사경을 하다 보니 10년을 훌쩍 넘겼다.

“고려의 선인들은 몽고침탈의 와중에 목판에 팔만대장경을 새겼는데, 그 체험을 하지 못할망정 사경할 바에는 완벽하게 해야죠. 오자 내며 할 일 있겠어요?”

좀처럼 전시회를 하지 않는 스님이지만 한 번 열었다하면 관람객 1만여 명을 훌쩍 넘겨 문화계를 놀라게 한다. 2000년 부산, 2001년 서울, 2004년 대구에 이어 네 번째로 개최한 지난 3월 대만 전시회에는 2만여 명이 방문했다. 당시 사경을 친견한 관람객들은 ‘심사유곡에 석굴과 불상을 조성한 법사의 수행’을 찬탄했으며, 이에 스님은 전시회 기간에 모아진 보시금(약 1억원) 전액을 13개 단체에 희사한 사실이 중국시보(中國時報), 인간복보(人間福報) 등 유수의 언론을 통해 알려져 또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마저 스님에게는 ‘내 세울 일이 아니다’. 스님은, 불사를 많이 해 놓고 찬사를 듣고 싶어 하는 양무제에게 달마스님이 던진 ‘소무공덕(所無功德)’을 얘기를 꺼냈다.

“마음 가운데 털끝만큼 이라도 공덕이라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얘기거든. 공덕의 그림자마저 지워버린 연후에 얘기하라는 것이죠.” 불사해서 무엇을 이뤘다는 그 생각이 남아있는 만큼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스님은 강조했다.

“부처님의 참모습은 형상에 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형상에 빠져있기 때문에 형상을 통해 부처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기 위한 것이 불사입니다. 그 불사를 통해 부처님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부처님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 그게 바로 중생제도라.” 그런 점에서 “모든 불사는 바로 불심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설치예술”이다.

“그래서 자기 모습을 지워가는 게 참수행이라 봅니다. 이것이 내가 한 불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옳은 불사가 아닙니다. 나도 내 모습을 모두 지우지 못한 사람이지만 내 모습을 지우는 것이 참수행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이런 것이 내 나름대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세계를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마지막에 가서 그런 그림자마저 지우는 것이 수행이라고 봐요.”

스님은 만공스님에게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받아 평생 정진한 부친의 영향으로 부산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했다. 부친은 “확철대오해서 큰 소리는 못 쳤지만 돌아가실 때도 입에 ‘이 뭣고’를 달고 있을 정도”로 평생 화두를 놓지 않은 거사. 그런 부친의 영향을 받은 터라 스님은 행자 때부터 ‘항상 참선해야 한다’고 생각해 화두를 갖게 됐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돌이켜보라’ 은사 석암스님도 그런 사정을 잘 알기에 행자를 세심하게 살폈다. 어는 정도 세월이 흘렀을까? 은사는 상좌를 불러들였다.

“10겁을 앉아있어도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했는데 자네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라고 물었다. 제자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불법이 나타나면 헛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심성이 허공과 같아 필경 안과 밖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법을 요달할 것 같으면 거짓도 참도 아니로다(心性如虛空 畢竟無內外 了達如是法 非僞亦非眞)”라는 전법게를 내렸다. 경허스님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 혜월스님의 법이 석호-석암스님을 통해 원응스님에게 전해진 것이다. 법호는 구한(久閒)이었다.

“옛날 스님들이 우리가 처음 공부하러 들어올 때 하심(下心)을 많이 권했어요. 과거에 많이 들어온 말인데 남한테도 들려주고 싶거든. 오늘날 우리사회가 물질도 풍족해지고 사는 것도 편리해진 반면 소통은 둔해지고 삶은 더 각박해지고 있어.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비우는 게 공부라. 우리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종국에는 자기를 버리라는 공부가 아닌가. ‘나’란 존재를 씻어버리면 너와 나의 간격이 없어져 버리고 ‘나’를 세울수록 그 간격은 벌어집니다. ‘나’를 비우면 종교간 국가 간에도 싸울 일이 없어질 겁니다. 몇 번 죽고 몇 번 다시 살아나더라도 자기 화두는 놓쳐서도 버려서도 안 됩니다. 자기면목이 드러날 때까지 화두 속에 살아야 됩니다.”




 서암정사와 원응스님 /

 20여년 주석하며 석굴법당 불사


벌써 40년이 넘었다. 스님이 어느 날 복잡한 도시 부산을 뒤로 하고 청산(靑山)에 파묻힐 양으로 심산유곡의 수행처를 찾아 정처 없이 흰구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 벽송사다. 때로는 감자를 심어 끼니를 때우고 몸소 흙더미를 치워가며 이어가는 수행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너무 힘이 들어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이 몇 번이나 일어나기도 했지만 탈금(脫金)이 다 되어 시꺼먼 모습으로 초라해지는 부처님을 들여다보며 폐허를 수습하던 어느 날 포행 중 발길이 멈췄다. 벽송사에서 약 500미터 쯤 떨어졌을까? 지금의 서암정사터다. 자세히 살펴보니 갖가지 큰 바위들이 온갖 형상으로 숲 속이나 흙 속에 감추어져 있고, 장엄하게 솟은 앞산 연화봉은 사양(斜陽)의 햇살을 받아 연꽃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 어찌 억겁의 세월을 숲 속에 숨겨져 사람의 인연을 기다리는 성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여기가 만년도량 자리로다.” 스님은 이렇게 확신하고 불사를 시작했다. 1975년 처음 터를 고르고 1988년에는 주변 부지를 매입해 본격적인 불사에 들어갔다.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조성한 석굴법당은 1989년 6월부터 조각을 시작해 10여년만인 2001년 완공했다. 정서향인 석굴법당의 전면은 서로 기대어 선 두 개의 큰 바위로 이뤄져 있다. 멀찌감치 앞에서 바라본 바위는 문수보살을 상징하는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고, 왼쪽바위는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거대한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다. 이 형상을 비롯한 갖가지 형상을 발을 옮기는 순간 순간 객의 발걸음은 여기가 바로 화엄세계가 아닌가 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1935년 경북 달성군에서 태어난 원응스님은 부산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은.계사로 출가, 사미계를 받았다.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이후 합천 해인사, 문경 김용사, 선산 도리사 등 선원에서 정진한 이후 벽송사 선원을 재건, 조실로 제방납자들을 제접하기도 했다.

함양=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472호/ 1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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